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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연합중앙회 김성학 회장, 그는 누구인가
홍산 편집위원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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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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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중국동포연합중앙회가 세상에 고성을 울렸습니다. 본 연합회가 재한중국동포사회의 중심에 우뚝 서기까지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과 70만 재한중국동포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본 중앙회는 모든 사심을 버리고 오직 동포사회를 위하고, 고국동포와의 화합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리고 적극 협조해 주시고 힘을 실어 주십시오. 결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뛰겠습니다.”

지난 7월 25일 영등포구 대림동에 위치한 연변냉면웨딩홀에서 2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중국동포연합중앙회’ 발대식에서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성학(金成鶴 56생)씨가 취임사 한 말이다.

   
▲ 중국동포연합중앙회 창립식에서 김성학 회장이 초대회장으로 취임하고 취임사를 하고 있다.
한중수교가 이뤄진지 벌써 20년이 지났다. 현재 한국에 있는 중국 조선족동포들은 비공식 숫자이기는 하나 공칭 70만 명으로 헤아린다.
우리가 흔히 ‘중국동포’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약장수’라는 이미지와 또 하나는 ‘불법체류자’이다.

한중수교이후 중국동포사회에서는 한국사회의 밝은 면이 크게 부각되었다. 중국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남북심리전의 영향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동포사회에서는 너도나도 한국에 가면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휩싸여 심양총영사관 앞에는 비자를 받기 위해 장사진을 치곤했는데, 여기에서부터 비극의 단초가 초래되었다.

브로커가 어느새 한국행 행렬에 비집고 들어와 돈으로 티켓을 좌지우지하게 됐던 것이다.
재중동포들은 꿈의 오아시스였던 한국 땅에 당도해서 처음 느낀 것은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다.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했던 그들에게 고국인 한국은 너무도 다른 이국땅이었다.
마치 재미유대인들이 미국 땅에만 당도하면 자유의 신천지가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들 앞에 닥친 것은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 장면에 나오듯 절망과 반유대주의에 신음했던 것처럼…

그 속에서도 ‘약장수’라는 딱지와 ‘불법체류자’란 멸시의 대명사가 그들을 옥죄고 있었다.
오늘 중국동포연합중앙회 김성학 회장은 그 누구보다도 한국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았고, 오기 때문에 지금도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자, 이제 김성학 씨의 서울생활 즉, 사업하면서 그가 겪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통해 중국동포들의 낮과 밤의 24시 이야기를 들어보자.

Q; 김 회장은 언제 서울에 오셨나요?
A; 저는 서울에 오기 전에 중국에서 검사생활을 했습니다. 검사생활을 하다 한중수교가 되니까 중국교포들 특히,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3성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대거 한국행을 선택하다 보니 중국동포들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해서 지난 95년 중국정부의 고위관계자(검찰청장, 당조직 부장)가 비공식으로 저를 ‘중국연변사무소 서울주재’ 대표로 파견했습니다. 그 후 저를 파견한 검찰청장도 바뀌고 저의 아내가 벌려놓은 사업도 있고 해서 2006년에 사표를 내고 지금까지 쭉 재한동포 사업가로 살아오고 있습니다.

Q; 부인과 함께 주로 어떤 사업을 하셨나요?
A; 중국 사람들이 해외에 나가 사업을 하는 데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 명제는 바로 의식주(衣·食·住) 사업을 하면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연변냉면 가게를 내면 사업도 번창할 수가 있고, 또 어려운 동포들이 연변냉면을 찾아와서 향수를 달래고 아픈 마음을 치유하는 만남의 장소를 마련할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 연변냉면을 오픈했지요.

Q; 냉면집을 처음에 어디에 오픈했나요?
   
▲ 김성학 회장이 운영하는 서울시 대림동에 위치한 '연변냉면' 본점.
A: 제가 2001년 냉면집을 오픈할 때만 해도 대림동 등 일대에는 중국동포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곳이 동대문 밖 장안동 경남호텔 옆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곳은 아주 번화가였습니다. 당시 1억5천만 원을 투자해서 40평 정도의 가게를 마련했어요.

그 시기에는 중국동포들이 불법체류자로 쫓겨 다니던 시절인데 KBS방송국에서 ‘중국동포들의 어두운 면만 부각되고 있는데 당신같이 당당하게 사업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해서 취재를 했는데 ‘피플 세상속으로’란 프로그램에서 25분 동안 방영됐습니다.

이 방송이 나가자 우리 가게는 하루아침에 중국동포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었습니다. 방송의 위력이 그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고향 생각나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불법체류자로 쫓기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부산, 울산, 수원, 의정부 등 전국 어디에서도 거기가면 고향사람, 소식 끊긴 사람 만날 수 있다고 해서 몰려들었습니다. 그야말로 문전성시였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회상하면 참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보람된 사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도 얼마 못가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토박이 건달 깡패들이 들이닥쳐 “이 중국 놈이 와서 신고도 하지 않고 이 난리를 떨어!”하며 “너 이 동네 인사법 있는 것 알아? 이 동네 인사법은 헌법 위에 있다는 것 알아?”라며 공갈협박, 심지어 목에 시퍼런 칼을 들이대지를 않나, 숱한 인간적 모멸과 협박을 당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더 버티다 잘못하면 내 아내의 목숨마저 위협받겠다 싶어 결국 꿈 많던 장안동 가게를 접어야만 했습니다.

Q; 그러면 그 후 냉면집은 어떻게 됐습니까?
A; 그래서 대림동 동쪽을 택하게 됐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림동은 서울에서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습니다. 식당가라 해도 30평이 넘는 식당은 전무했고 그리고 지저분한 거리였습니다.

저는 여기가 내가 터를 잡을 좋은 위치라 생각했습니다. 달라는 권리금도 다 주고 집주인과 계약할 일만 남았는데 집주인은 “당신이 중국사람인데 뭘 믿고 당신에게 가게를 세주냐? 불나면 어쩔 거냐?”면서 약 3개월을 실랑이를 했습니다.

김성학 회장은 이 터에 반드시 ‘연변냉면집’을 내겠다는 각오로 비록 권리금도 떼이고 사기를 당하고 집주인이 거들떠보지를 않아도 무조건 밀어붙여 끝내 가게 문을 열었다. 그 날이 4월 28일이다. 그는 먼저 큼직한 간판부터 내걸었다. 홀에 1명, 주방에 2명을 배치하고 가게를 오픈했다. 개업식 날 하루에 260만원의 매상을 올렸다고 한다. 당시는 큰 돈이었다. 그는 그날 밤 문을 닫고 소리 없이 아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고 회상하면서 대담자 앞에서 연신 휴지를 꺼내든다.

대림동에서 장사가 될 만하니 이번에는 파출소나 구청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쉴 새 없이 오라 가라 한다. 가게에서 조선족동포들이 술 한잔 걸치고는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노상방뇨, 중국말로 시끄럽게 떠들기에 동네 주민들의 신고가 빈번했기 때문이다. 사정사정하면서 머리 굽신대는 것이 하루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서 담당형사가 출두하라고 해서 경찰서로 갔더니 의자에 앉으라며 대뜸 하는 말이 “당신이 사장이요? 마누라가 한국국적 취득해서 위장결혼해서 식당 하더구먼.”하고 쏘아붙이더란다.

하도 어이가 없고 화가 치밀어 올라 그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만든 주재원 명함을 건네면서 “나는 ‘중국 연변사무소 서울주재 대표이고 검사입니다. 당신 말버릇이 그게 뭡니까. 내가 현지에서 근무할 때 당신들의 높은 상관이 나를 찾아와 교류를 맺은 사람이 여럿 있어요. 어디서 증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함부로 지껄여요!”라고 쏘아붙이면서 의자를 걷어차고 그냥 나와 버렸다고 한다.

일주일쯤 지나자 그 형사가 쫓아와 “그런 분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면서 용서를 빌기에 “여보, 내 마누라는 본부인이며 중국에서 국어교사를 하다가 나왔어요. 어디서 위장결혼이니 그따위 소리를 지껄입니까”라고 쏘아붙였다.

김성학 회장, 그는 여직껏 오기로 버티고 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서울 대림동에서 연변냉면집과 그 주변에 여러 개의 지점 그리고 예식장 건물을 구입해 운영하고 있다. 중국조선족 출신치고는 몇 안 되는 사업가로 알려졌다.

Q; 김 회장님 돈도 꽤 벌었고 이제는 중국에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까?
   
 
A; 아직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제는 돈 한푼 안 벌어도 가족들이 생활하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 한은 그대로 제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제가 고국에 와서 가장 소중하게 얻은 것은 돈이 아니고 바로 딸아이입니다. 큰 아들은 중국에서 낳았고 딸아이는 한국에서 낳았어요. 제 자신이 중국 태생이고 중국에서 성공해보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법대도 들어가고 공산당에도 가입하여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마누라가 임신을 했지만 진급하고 출세하는 것이 우선이어서 어쩔 수 없이 지웠습니다. 마침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던 시기였거든요. 고국에서 처음으로 한국 백화점에 가보니 그렇게 예쁜 아이들의 옷이 진열대에 예쁘게 걸려있는 거예요. 예쁜 딸을 낳아 저런 옷 한번 입혀보고 싶은 충동이 불현듯 나는 거예요. 그래서 임신에 성공했어요. 하지만 임신 3개월째인데 중국에서 검찰청장 내외분이 오신 거예요. 저는 출근하고 집사람한테 청장 내외분의 쇼핑을 도와드리라고 했더니 3일째 되던 날 하열이 심해 병원에 가 보니 유산됐다고 하더군요. 정말 하늘이 무너질 듯 절망했습니다. 다행이도 그 다음해에 또 임신이 됐어요. 정말 노력 많이 했지요. 그러나 평소 형님 아우로 맺은 한국인이 돈을 달라는 것을 거절하자 악심 품고 중국 우황청심환과 노경이 내게 있다는 것을 알고 약재밀수로 경찰에 고발하였습니다. 멋도 모르고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아내는 그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아이고 배야!’하고 병원에 실려가 조산했습니다. 이튿날 9시에 아이를 낳았는데 하마트면 사산할 뻔 했습니다. 저는 물론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볼 수 없었지요. 저는 애원하다시피 형사 바지가랭이를 잡고 ‘저는 공직자였고 도망갈 사람도 아니니 집사람이 병원에 있다고 하니 애기 태어나는 것만 보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애원했어요. 하지만 형사는 듣는 둥 마는 둥 그건 너의 사정이지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투로 저를 붙잡아두는 거예요. 애가 태어난 후 조서 몇 장 쓰고 나왔지만요. 참으로 인정사정없는 고국사회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큰 아들이 96년에 입국했어요. 당시 제가 근무하던 사무실에는 중국의 고위공무원 자제분 셋이 있었습니다. 그 세 아이들을 전북에 있는 모 중학교에 유학생으로 데려가 대학까지 책임지겠다고 ‘연변자치주정부’와 MOU를 맺고 데려갔습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이 찝찝했지만 학교에서 책임지고 잘 지도한다기에 믿고 맡겼어요.

하지만 학교에 기숙사 시설이 없어서 같은 반 학부모가 데리고 있겠다고 해서 또 믿고 보냈습니다.

저는 한 달에 두 차례정도 내려가 매달 10만원씩 드리고 약이며 감사의 선물도 빠트리지 않고 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성격이 점점 이상해지는 거예요. 말도 없어지고 무언가 울분에 찬 기색이 역역했어요.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그 집에서는 중국에서 왔다고 밥도 따로 먹이고, 화장실도 집에서 떨어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게 했답니다. 어쩌다 밥을 더 먹으려고 하면 ‘야! 중국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먹냐?’며 야단을 치더라는 겁니다.

김 회장이 이 이야기를 잇는 동안 그는 손을 화장지 쪽으로 몇 번이나 내밀었다. 그때가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도 “그 댁은 착실한 기독교 집안이니까 안심해도 됩니다”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에 분개한다.

김 회장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면서 아주 민감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다. 국정원과 법무부 관련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 정부가 중국 조선족문제를 한갓 억제 대상이요, 이용대상자로 밖에 인식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김 회장도 이 대목에서 “어느 땐가 이야기 할 날이 오겠지요. 나로서는 큰 충격적인 이야기라 가슴에 묻어두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조선족을 위하여 행동해야 합니다. 몇 년 전부터 저는 그동안 중국동포들의 사망사건이 일어난다든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보면 그냥 참고 넘어가는 사람이 못돼요. 그래서 제 돈을 써가며 돈 받아주고, 경찰서에 찾아가서 항의도 하고, 억울하게 잡혀 있는 동포들 빼내주기도 했습니다.”

“몇 년 전 관악구청의 모 과장이 시흥에서 교통사고를 냈습니다. 죽은 사람은 물론 우리 동포였습니다.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과속으로 인한 치사였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검찰에 자료를 제시하여 간신히 사고를 낸 당사자의 과실로 3,300만원 그리고 보험회사에서 5,500만원을 받아줬어요. 사실대로 했다면 그 구청 공무원은 무조건 구속감이고 실형을 살아야할 사안이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 조선족들이 고국에서 사람대접 받고 살려면 우선 조선족동포들이 단합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또한 고국인 한국이 우리들을 짐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한국 산업현장의 충실한 일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한국 산업현장에서 빠져나가면 아마도 마비되는 현장이 많을 것입니다. 식당에서, 건설현장에서, 병원의 간병인, 가정부 등 조선족동포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3D업종에는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거의 점령하다시피 됐습니다. 이제 우리 고국동포들도 조선족의 위치와 미래를 새롭게 인식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Q; 끝으로 ‘연합회’의 목표는 무엇인지요?
   
▲ 중국동포연합중앙회가 지난 6월 14일 서울 영등포경찰서와 함께 대림동 일대를 순회하며 4대 사회악 근절 및 기초질서 확립, 중국동포 이미지 개선 등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A; ‘재한중국동포연합중앙회’가 성공리에 자리 잡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단계를 거치면 전 세계에 진출한 ‘조선족연합회네트워크’를 결성할 것입니다. 이 ‘연합회’는 예를 들면 시진핑 중국 주석이 캐나다를 방문하게 되면 캐나다 거주 중국 조선족동포들이 거리에서 환영대회를 가질 것이며 유럽이나 일본을 방문하면 역시 우리 조선족동포들이 앞장서서 환영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전 세계 조선족동포들의 위치와 단결력을 과시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토대로 조선족의 위상과 권리를 찾아 새로운 조선족 시대를 열어갈 것입니다.

김성학 회장은 고국 동포들이 조선족에 대한 인식 전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한다. 조선족 동포들은 고국의 ‘짐’이 아니라 어엿한 고국 발전의 산업 역군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야 한다고 한다. 동포들이 어느 정도의 학력과 지식을 습득해서 고국에서 일하는데 고국은 동포들에게 연필 한자루, 공책 한권 사준 일 없었다. 한국행 비행기표 한 장 사준 일이 없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다문화 가정’이라고 해서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드려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우리 중국동포는 제외되고 있다. 또한 중앙회보다 먼저 출발한 몇몇 단체들이 있다. 그 중에는 유명무실한 단체가 있는가 하면 서대문 무악재에 있는 충실한 연합회도 있다. 이들 단체와도 윈윈의 기본으로 돌아가 상생 발전하도록 협력하여 어느 때인가 하나로 통합하는 방안도 찾아본다고 한다. 그래서 김 회장은 몇 가지 중점사업을 펼치겠다고 한다.

첫째, 소통과 화합, 협력, 사랑, 혁신정신으로 재한동포사회 모든 리더들과 대화를 하고 문제를 풀어가며 동포사회가 함께 가는 상생의 길을 모색한다.
둘째, 재한동포 정책의 연구와 개발 및 제안, 재한동포 관련 정책의 개폐에 대한 의견 제시, 재한동포의 복리, 한국사회 적응교육, 법률교육 등 동포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적극 추진한다.

셋째,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문화교류 가교역할에 힘쓰며, 매년 중앙회 차원의 대형 이벤트를 조직하여 동포들을 위로하고 동포단체들 간의 단합을 돈독히 하도록 한다.

넷째, 교육은 민족의 백년대계이다. 동포어린이들이 배움에 어려움이 없도록 좋은 환경조성에 힘쓰며, 동포유학생을 포함한 장학사업에 적극 나서겠다.

다섯째,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전통미덕이다. 현재 한국에는 수많은 동포1세 노인들이 열악한 주거환경과 생활고 속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자식과 같은 마음으로 여러 동포 단체장들과 함께 수시로 노인정을 방문하여 위로행사를 갖고 지방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여섯째, 지역사회와의 안정과 소통, 동포이미지 제고를 위해 치안과 봉사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겠다.

일곱째, 대림동을 명실공히 대한민국의 중국동포타운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며 여러분들의 힘을 빌려 영등포구청과 시청에 지속적으로 건의하여 대림동에 ‘중국동포타운’이라는 아치를 세우도록 노력하겠다.

글·대담/홍산 편집위원
사진/ 최유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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