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필웅 / 문화부 기자

▲ 서필웅 문화부기자

지난 7일 중국 하얼빈 최대의 극장인 환구극장.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를 다룬 창작뮤지컬 ‘영웅’이 공연되고 있었다. 최근 이상고온이 이어지고 있다는 하얼빈에 오랜만에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이 찾아왔지만 극장은 1400명이 넘는 관객으로 북적였다. 이틀 동안 3회 열린 공연에서 4000명 가까운 관객몰이를 했으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연 이전부터 제작진은 자신만만했다. “제작 단계부터 해외 관객들의 눈을 의식해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제작진의 장담대로 ‘영웅’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한국과 중국 관객들만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초 이 작품은 민주당 정권 시절의 일본 공연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웅’의 내용을 감안해볼 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일본 민주당의 개혁 성향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영웅’ 자체의 힘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한국 독립투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국경을 넘어 모든 관객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영웅’은 민족독립투사인 안중근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안중근이라는 인물을 오직 조국의 독립에만 열중한 인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히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평화다. 평화를 추구하기에 역설적이게도 총을 들어야 했던 당시 현실에서 연민과 슬픔이 묻어나온다. 작품은 놀랍게도 이토 히로부미조차 악독한 침략의 수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나름 합리성을 가졌으되 국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구시대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안중근 의거를 민족 대 민족의 충돌이 아닌 평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자국 이익을 추구하는 구시대적 사상 간의 충돌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을 보면서 관객들은 자연히 안 의사가 외친 평화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소재인 ‘영웅’이 세계인들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었던 이유다.

그동안 해외를 공략했던 한국의 문화상품은 크게 두 가지 특성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 등의 공연이 한국적인 소재를 통해 세계의 문을 두드렸다면 K-팝 등은 한국적인 것을 완전히 배제한 무국적적인 문화상품으로 세계인에게 다가갔다. 다만 이 두 가지 모두 일정 부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한국적인 문화상품은 더 많은 세계인을 끌어당기는 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고, 무국적의 문화상품은 보편성은 가졌으되 지속력에서 한계가 명확했다. 한국적인 정신 속에서 세계인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보편적 정신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했을까.

할리우드 영화가 세계인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재미와 기술적 역량 때문만이 아니다. 미국 특유의 ‘아메리칸 드림’ 문화 속에서 전 세계인이 공감할 만한 그들 나름의 보편적 정신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영웅’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속에도 그런 보편적 정신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수천년 역사를 통틀어 평화를 추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는 그 보편적 정신을 찾아낼 수 있는 금광일지도 모른다. 안 의사가 감옥에서 동양의 평화를 외치는 장면에서 큰 박수를 보내는 중국 관객들을 보며 작은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