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현/ MBC 전 프로듀서

▲ 김용현/ MBC 전 프로듀서

1636년 추운 겨울 인조가 청나라 군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남한산성'을 읽다보면 눈물이 쏟아진다. 우리 임금이 엄동설한에 47일간이나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결국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세 번이나 절을 했던 병자호란의 추억, 그때로부터 갑신정변 때까지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1895년 을미년 가을 일본 수비대와 낭인들이 야밤에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민비'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불태워 버린 사건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를 확장시킨 사악한 여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남의 나라 황후를 무참히 살해하며 한반도 강점을 치밀하게 추진해 나간 일본의 그 천인공노할 만행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1910년 여름 일본이 한반도 강점에 성공하자 우리 선조들은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만주 등 해외로 유랑생활을 떠난다. 나라 없는 백성들이 해외에서 겪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까레이스키)들의 수난사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가장 참담한 역사였다.

1937년 초겨울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에 모여 살던 17만 명의 고려인들에게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시베리아를 거쳐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시킨 사건은 약소 민족의 슬픈 과거다. 스탈린 치하에서 자행된 이같은 반인륜적 민족 탄압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1993년 일단 사과하기는 했으나 그들에게 약속했던 개인 자산의 반환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15년 봄 태평양 건너 한반도에 다시 거친 격랑이 일고 있다. 100여년 전 우리 민족이 겪었던 역경과 질곡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주변 4대 강국의 이해관계가 다시 한반도에서 굉음을 내며 부딪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겉으로 내세우는 말은 그럴듯 하지만 저마다의 마음 속에는 자기 이익, 자기네 국익만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한국의 국익은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는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문제는 중국편을 들었으니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는 미국편을 들어야 한다? 그런 발상은 주권국가의 외교가 아니다. 우리의 국익에 맞으면 선제적으로 다 들어 주는 것이고 국익이 아니라면 다 물리치면 되는 것이다.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것은 배부를 때 하는 소리다. 남북관계, 한일관계도 그런 식으로 망쳐놓지 않았는가?

분단을 극복하고 한국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동북아의 역사를 만들어 가려면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있는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협력은 필수적 요소다. 그중 러시아는 남과 북에 균형성을 갖고 있으며 동북아에서 영토나 국경 문제가 없는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앞으로 한·러 관계의 발전에 특별히 역점을 둘 필요가 있다.

역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는 직진만 하지는 않는다. 때로 돌아가기도 하고 오던 길로 후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정한 방향은 있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은 곧 자유의 확대 과정이라고 말했지만 한반도에서는 정치, 경제, 문화적 민주주의가 더 전진하고 남북이 화해 협력하면서 통일을 지향해 가는 것이 역사의 옳은 방향임에는 틀림이 없다.

기독교의 고난 주간을 보내고 있다. 지금 한반도에 불어 닥친 거센 파도는 또 한 번의 연단이며 소망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