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훈 / 경제산업부 부장대우

▲오승훈 경제산업부 부장대우

2년 전 우연히 사석에서 만난 최영진(연세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전 주미대사가 비장한 어조로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미·중·일의 틈바구니에서 다시 19세기의 문제를 풀어야 할 땝니다.” 당시 그의 이야기를 길게 듣진 못했으나, 41년 동안 국제무대를 누빈 외교관의 깊은 통찰에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해 말 그는 ‘신(新)조선책략’이란 책을 펴냈다. 그가 황쭌셴(黃遵憲)에게 주목한 건 합종연횡의 수 싸움이 난무하는 정세변화 속에서 미·중·일과의 전략적 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란다. 그는 20세기를 지배했던 전쟁 패러다임이 21세기 들어 무역 패러다임으로 전환됐다고 봤고, 한·미 동맹과 한·중 협력의 병행에 방점을 찍었다. 황쭌셴이 조선의 생존전략으로 친중(親中)·결일(結日)·연미(聯美)를 제시했는데, 130년의 시간 차를 두고 최 교수는 맹미(盟美)·연중(聯中)·교일(交日)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해법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그가 강조했던 문제의식만큼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미국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과 중국이 앞장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 문제가 미묘하고, 미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가 난제로 등장했다. 미·중 간 견제와 경쟁에 따라 한·미, 한·중, 미·일, 한·일의 거리가 연쇄 이동하는 현상도 직감할 수 있다.

이에 대응한 정부의 대외전략을 압축하면 맹미(盟美)·연중((聯中)에다 척일(斥日) 정도가 될 듯한데, 이를 걱정하는 시선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정부가 친해 보려는 곳에는 진전이 없고, 관계를 맺으려는 데에는 신뢰가 의심되며, 배척하려는 곳엔 전략이 없어 보여서다. 최악인 것은 외교 전략의 난맥이 경제로 전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3국과의 전략적 관계는 동북아의 정치·외교만이 아니라 세계 경제 패권에 관한 문제다. 올해 초 ‘새 미국 시대’를 선언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국내 경기회복을 기반으로 세계 경제 주도권 복귀를 벼르고 있다. AIIB의 흥행에 성공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자신의 ‘일대일로’(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 무역 전쟁의 와중에 기축통화의 위상을 놓고 벌이는 금융전쟁도 수시로 글로벌 시장을 압박할 것이다.

우리에게 직격탄이 될 최대 변수들도 이들에게 있다. 미국이 언제 금리를 인상할지, 중국이 어떻게 성장 둔화를 관리할지, 일본이 언제까지 엔저(엔화 가치 하락)를 지속할지가 관건이다. 우리로선 개입이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독립 변수들이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가 대외변수에 강한 면모를 갖출 수 있는 해법은 현 정부가 출범한 2년 전에도, 훨씬 그 이전에도 모두 알고 있었다. 진작부터 내수 성장을 견인할 서비스업 활성화, 국제경쟁력을 높일 산업구조 재편, 자본시장 개방에 대응한 금융 시스템 선진화가 강조돼 왔다. 하지만 어디를 봐도, 어느 것을 놓고 봐도 ‘개혁 시계’는 제때를 놓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세계 경제 패권 전쟁 속의 생존전략으로 ‘신조선책략’을 갖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