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진/부국장·멀티미디어 부장

일본 '미쓰비시(三菱) 머티리얼'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미쓰비시는 2차 대전 때 전쟁물자를 생산한 일본의 대표적인 군수업체다. 논란은 그들의 느닷없는 사과에서 비롯됐다. 미쓰비시는 최근 미국으로 가 전쟁포로 강제노역에 대해 사과했다. 중국인 피해자 3천700명에 대해서도 합의를 제안했다. 영국,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검토 중이다.

일본에 대해 무기력한 정부, 무관
심한 국회, 무개념 지자체가 광복
70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한국만 쏙 빠졌는데, 그 이유가 아주 치욕적이다. 한일병합조약(1910년)으로 한국은 일본에 귀속됐고,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한국인, 즉 자국민을 데려다 일을 시켰는데 무슨 사과, 보상이냐는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한국인은 '일본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논리다.

한반도를 '되찾아야 할 영토'로 여기는 제국주의 망상이 뿌리박혀 있지 않고선 나올 수 없는 궤변이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건 한국 정부다. 너무나 무기력하다. 분노할 줄을 모른다. 일개 기업이 국민을 농락하고 있는데 고상한 '외교' 타령이다. "관련 소송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은 자제한다"고 했다.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란 말은 미쓰비시의 주장에도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2013년 서울고등법원과 부산고등법원은 피고 측에 위자료 지급을 명령했다. 미쓰비시는 불복했고, 사건은 계류 중이다. 미국에는 제발로 찾아가 사과하면서, 한국에선 판결까지 거부하는 미쓰비시의 행태에 대해 정부는 '자제'를 말하고 있다.

일본 집권당이 위안부 강제 연행을 부정하는 뜻이 담긴 문서를 일본 정부에 보낼 예정이라는 소식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가 전부다.

일본은 '행동'하는데, 한국은 '말'뿐이다. 그동안 수없이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했지만 그뿐이다.

국회라도 제구실을 해야 하는데, 마찬가지다. 최근 한 여당 의원은 "과거사 문제가 양국 발전에 걸림돌이 돼 왔지만 그것이 양국관계 발전을 저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세련되고 합리적인 정치'를 생각한 모양이다. 국회의원들이 일본을 오가며 축구와 바둑을 즐기는 사이, 한국인 피해자들은 치욕까지 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원폭 피해자와 그 자녀를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안이 2012년부터 4건이나 발의됐지만 허사다.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피폭된 한국인은 7만 명, 그중 생존자는 2천600명 정도다. 71~80세가 전체의 70%, 81~90세가 23%이다. 표에 민감한 국회의원들이 관심 가질 대상이 아니다.

내년 4월이면 또 총선이다. 무더위가 가시면 본격적으로 선거정국이 시작된다. 특별법안은 이번 국회에서도 자동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더라도, 원폭피해자들이 큰 충격을 받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지난 70년 동안 '버림'이란 단어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원폭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28건의 소송과 재판을 이어왔지만 우리 정부의 도움은 전혀 없었다.

2012년부터 매년 경남 합천에서는 비핵·평화대회가 열리고 있다. 절망을 대물림하며 살아가는 피폭자의 삶에 공감하고,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다.

그런데 경남도가 지원하는 예산이 턱없이 줄었다. 2012년 3천500만 원을 지원하더니 2013년 2천870만 원, 2014년엔 2천500만 원으로 각각 깎였고, 광복 70주년인 올해는 첫해의 절반도 되지 않는 1천500만 원이다.

2012년 첫 대회 때는 일본, 대만, 러시아 등 세계 각국의 방사선 피폭 피해자, 평화운동가들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적 규모로 행사가 치러졌다. 예산이 깎이면서 행사도 쪼그라들었고, 올해는 8월 5일 하루 동안 영화상영, 난장, 야외공연 등으로 치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재정건전화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올해 행사까지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리는 경남도의 사고방식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무기력한 정부, 무관심한 국회, 무개념 지자체가 광복 70주년을 맞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