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신 / 정치부 부장대우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은 항일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무거운 주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는 역사적 실재와 허구를 넘나든다. 중국 상하이(上海) 조계지, 김구·김원봉 의열투쟁,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지청천 장군의 항일무장투쟁 등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암살 대상인 조선군 사령관 가와구치를 비롯해 암살을 실행하는 독립군 출신의 여전사 안옥윤(전지현 분)과 임정의 국내 요원 아네모네 마담(김해숙 분) 등 대부분 등장인물은 허구다. 1933년 서울에서 임정 암살단이 친일파 거두와 조선군 사령관을 암살한다는 설정은 허구이긴 하지만 배우들의 혼신의 연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항일독립운동 열사들의 웅혼한 기상과 구국혼이 벅찬 역사의 광장으로 초대한다.

7월 중순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좇아 상하이-항저우(杭州)-난징(南京)-충칭(重慶)의 한·중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탐방하고 돌아온 직후라 일경의 감시를 피해 중국 대륙에서 대장정을 펼친 선열들의 고난에 찬 행군과 오버랩됐다. 중국 대륙 전역에서 시진핑(習近平) 정부가 펼치고 있는 거대한 중·일 역사전쟁의 열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가 30만 명을 학살한 현장인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거대한 조형물들로 새로 단장됐다. 난징의 기념관은 대륙 전역에서 찾아온 중국인들의 소리 없는 분노의 함성이 넘쳤다. 동행한 교장 선생님은 “우리 독립기념관도 생생한 역사 현장을 담은 난징대학살기념관을 벤치마킹했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 731부대 터에서는 독가스 시설을 비롯한 1500점 이상의 유물 발굴작업을 진행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및 중국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9월 3일)에 맞춰 ‘중국 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 중국 국가문물국은 731부대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이란 또 다른 역사전쟁 채비를 갖추고 있다.

시진핑 정부는 상하이·항저우·충칭의 대한민국 임정 기념관의 리모델링 작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상하이 루쉰공원(옛 홍커우공원) 윤봉길의사기념관은 일본 정부의 로비 산물인 정체불명의 ‘매정(梅亭)’ 간판이 지난 5월 윤 의사 호인 ‘매헌(梅軒)’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새로 단장한 항저우 임정 청사는 2014년 중국의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승격됐다.

김구 선생 피난처를 비롯한 임정 항일유적 기념관의 공통점은 한·중 독립운동가들의 연대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역사에 대한 재조명이었다. 시진핑 정부가 항일 역사전쟁에 한국과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포착됐다. 최근 러시아가 일본의 로비로 연해주 등의 안중근 의사 유적지 표지석까지 철거한 것과 비교된다. 광복 70주년, 안중근 의사 유해송환조차 못하는 가슴 아픈 현실은 시진핑 정부의 소리 없는 역사전쟁과 비교된다. 영웅의 유해를 찾아가지 못하는 한민족을 중국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국민 역사 교육의 토대가 약하면 군사·경제 강국의 꿈도 사상누각이다. 중국의 소리 소문 없는 역사 굴기(堀起)가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