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정/ 일본 류코쿠대학 명예교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어디선가 질병과 만나 고뇌에 시달린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과의 경쟁의 과정이다. 그리고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걸 스스로 제어하지 못한다. 죽음, 질병(고뇌), 경쟁, 사랑(미움)… 인간이 스스로 회피할 수도 컨트롤할 수도 없는 이것들을 야스퍼스(K. Jaspers)는 한계상황(限界状況・Grenzsituation)이라고 말한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어디서 무엇이 뒤틀렸는지 서로 미워하고 헐뜯기에 바쁘다. 좀더 확실하게 말하면 두 나라의 일부 사람들은 두 나라는 ‘원초적’으로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이이고 아무도 영원히 이 관계를 돌려놓을 수 없다는 양 기염을 토하고 있다.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은 그야말로 한계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본에 거주하는 자로서 이러한 분위기에 특히 놀라고 있는 이유가 두가지 있다. 첫째, 이런 살벌한 분위기가 어느날 갑자기 형성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 분위기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실시한 한일 양국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보면, 서로 짜기라도 한듯이 한국인은 일본을, 일본인은 한국을 싫어하는 나라 랭킹 2위로 꼽고 있었다. 이 때 한일 양국에서 서로 호의를 갖는 사람는 역시 똑같이 5% 미만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본의 분위기만 본다면 ‘싫음’ ‘미움’보다는 ‘무관심’이 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1980년대 소위 한일간의 '교과서 전쟁'으로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지만 2000년대 들어서 한일월드컵 공동 주최,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연가'로 시작되는 한류 붐이 일면서 두 나라 관계는 놀라울 만큼 바뀌었다. 한류 붐이 한창일 때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50%를 넘었고,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70%를 넘고 있었다. 놀라울 뿐이었다. 더 놀란 것은 이 무렵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 명동에 들렀을 때였다. 여기가 한국인가 일본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본인만 보였고 일본말만 들렸다. 그만큼 한국을 찾는 일본인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 한국 드라마, K-pop에 대해서는 내가 일본인한테 배워야 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썰렁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살벌한 Hate Speech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같은 시기 한국의 분위기 변화에 대해서는 특별히 들은 바 없다. 대통령이 독도에 상륙했고 그래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는 소문만 들었다. 다만, 한국에는 좋은 세월 나쁜 세월 가리지 않고 반일의 무드가 늘 저변에 깔려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갑작스런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는 보기 어렵다. 실제로 양국 관계가 험악해진 이후에도 일본을 찾는 한국인은 줄기는 커녕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에 비해 한국을 찾는 일본인은, 원고・엔저의 감안치를 훨씬 넘게 격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는 '저질' 이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혐한론, 반한론(反韓論), 악한론(惡韓論)이 기세를 올리고, 그런 따위의 책을 쓰는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고도 하고 그런 따위의 기사를 싣지 않으면 주간지가 팔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조금은 진정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피부로 느끼는 한일 관계는 여전히 한계상황 그것이다.

한·일 두 나라(사람)는 정말 원초적으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이인가?

고대 한반도에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고 한다. 한쌍의 남녀가 벌거벗고 밭일을 했다. 남자가 자루 달린 연장으로 밭을 일구면 여자가 뒤따라가며 구멍을 내고 다시 남자가 그 구멍에 씨앗을 넣었다. 그리고나서 둘이는 그 밭에서 성교를 하는 것으로 밭일을 끝냈다는 것이다. 성교는 풍작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에도 같은 습속이 있었다고 한다. 남녀가 알몸으로 모내기를 하고 그 논두렁에서 성교를 하는 걸로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것이다. 성(性)이란 성(聖)스러운 생명의 원천이며 풍요를 약속하는 상징이라는 생각을 한반도의 사람도 일본열도의 사람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는 신도(神道)라는 토속신앙이 있고 이 신앙의 집전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신사(神社)라는 게 있다. 이는 일본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실은 이 신사의 원형이랄까 원시적인 형태가 한반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예컨대, 오카야코지‐岡谷公二 주장). 실제로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 주변에 서낭당, 산신당 같은 신앙적 성격을 띤 '당'들이 꽤 많았다. 절간에도 불교와는 아무 관계 없는 무슨 '당'들이 있었다. 불교가 토속신앙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불교가 늦게 들어왔다면 한국에도 신사와 같은 종교적 시설이 생겼을지 모른다고 마음대로 생각한 적도 있다. 또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무당이 '미코(巫女・神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존재한다.

이렇게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의식, 신앙, 사고방식을 공유해왔다. 문화적 유전자가 대단히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가까운 문화적 유전자가 일본에서의 한류 붐을 그토록 짧은 기간에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몰아갔는지 모른다.

한국사람과 일본 사람은 삶 그 자체를 함께 만들고 발전시켜온 역사를 갖고 있다. 대륙의 선진 생산기술을 익힌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본열도에 건너가 이미 정착해 있던 주민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넓혀갔다. 소위 '도래인(渡来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복수의 루트를 따라 따뜻하고 물 많은 젊은 땅을 찾아 일본열도에 건너간 것이다.

예를들면, '하타우지(秦氏)'라 불리는 집단이 있다. 이들은 해로로 일본의 호쿠리쿠(北陸) 근방에 도착한 후 다시 남진을 계속해 교토(京都) 근처의 우즈마사(太秦)에 정착하여 벼농사와 양잠을 시작했다. 하타 씨 집단은 이후 지금의 쿄토, 효고(兵庫) 지역에 걸쳐 크게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 밖에도　호쿠리쿠에서 교토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일본 최대의 호수인 비와코(琵琶湖) 주변에는 이와같은 도래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 도래인들의 생산기술은 열도 사람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했음에 틀림없다. 도래인 중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적활동을 하는 인텔리들도 있었다. 예컨대, '아야우지(漢氏)'라 불리는 집단이 그것이다. 일본이 대륙풍의 조직・제도를 도입하여 이의 운영・정비를 서두를 때 인텔리 아야 씨 집단이 크게 활약했던 것이다. 이렇게 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은 일본열도의 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제도의 정비에도 큰 몫을 하고 있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한국이 일본에 생산기술과 지식을 전수했다는 식의 자랑은 매우 우습다는 점이다. 도래인들은 자신들의 필요 충족과 꿈의 실현을 위해 열도에 건너가 열도의 사람들과 더불어 생산 고조에 힘을 썼고 열도의 사람들과 함께 사회 발전을 모색했을 뿐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하타 씨도 아야 씨도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하지 않고 당시 아시아의 보편적 세계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온 것처럼 진(秦), 한(漢) 씨라 칭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한 국가의 종속물이라는 의식보다 세계의 장인(匠人), 지식인이라는 프라이드가 더 중요했는지 모른다.

기술이나 지식의 전수를 자랑하기로 한다면 근대 서양 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발전시킨 일본이 한국에 전한 것도 당연히 인정하고 예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 자동차 엔진의 중요 부품은 거의 일본 제품이었다. 일본 기업의 기술이전에 대한 이해와 협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삼성, 현대의 위상이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의 기술이전이나 전수 역시 국가주의 차원에서 볼 문제는 아닐 것이다. 국가주의적인 우월감이나 교만은 우스꽝스럽다는 얘기다. 기술이전이나 전수에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경영과 장인의 논리가 우선되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니 지금과 같은 한일관계가 대단히 부자연스렵다는 느낌이 든다. 한반도의 사람들과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의 폭도 넓으리라 생각되는데 실제로는 피차에 소견 좁은 짓만 해오고 있다. 두 지역의 사람들은 수천년 동안 서로의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온 실적을 갖고 있으며, 그 노력의 성과로 오늘날 이 지역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성장해 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할 터인데, 반일과 혐한의 한계상황적인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이 현실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무엇인가, 문화적 유전자의 근사성도 몇 천년간의 상호협력의 노력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커다란 장애요인이 있음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범죄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가까운 만큼 갖가지 충돌도 많았다. 예를들면 왜구의 노략질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오랫동안 왜구의 준동이 계속되었으니 해안의 민중들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왜구라 해서 반드시 일본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해적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사람 중국 사람도 끼어있었다. 14-5세기에는 조선인이 주축이었다 한다. 일본어에 아무리 떼쓰고 울던 애라도 듣기만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무쿠리코쿠리”라는 말이 있는데, 무쿠리란 몽고, 코쿠리란 고려・조선을 의미한다. 일본을 침략한 몽고군과 노략질하는 조선 해적의 무서움을 전해주는 말이다. 다만, 이들 해적의 근거지가 일본의 세토나이(瀬戸内),　큐우슈(九州), 츠시마(対馬) 등에 있었기 때문에 왜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며, 일본 안에서도 이들은 머리아픈 존재였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같은 강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독재자도 이 해적들과 타협하고 힘을 빌려야 할 정도였다. 2014년도 서점상을 받은 소설 '무라카미(村上) 해적의 딸'은 당시 왜구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잘 그리고 있다. 다만 왜구의 피해가 아무리 컸다 해도 쌍방이 함께 입은 것이었고, 피해 지역이 넓었다 해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왜구가 한일 양국인의 관계를 한계상황으로 몰고갈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의 범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한일 두 나라와 사람들 사이를 결정적인 원한 관계로 만든 첫번째 범죄는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 침략이다(1592-1598). 한일 두 나라, 지역 사이에서는 왜구의 준동을 포함해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에 의한 전면적인 침략전쟁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특히 이 침략전쟁은 대의명분이 전혀 없었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잔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한과 분노를 더더욱 증폭시켰다.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그의 일본 제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나누어줄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드는 사람이 많지만, 침략은 논공행상이 이미 끝난 다음에 이루어졌고, 설령 그런 이유가 있었다 치더라도, 그런 일방적인 국내 사정으로 이웃나라에의 침략이 허용될 만큼 당시 아시아의 국제질서가 흐트러져있지 않았다. 이 침략전쟁은 늙은 탐욕가의 망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침략의 이유가 이렇다 보니, 침략 행위가 잔혹해질 수밖에 없어 양민들의 희생만 늘어났다. 침략군을 편성할 때, 카토키요마사(加藤清正)와 같은 무장 실전파와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코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같은 실무파로 나누어 경쟁을 시켰기 때문에 조선인의 희생이 더 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쿄토 시내를 걷다 보면 쿄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귀 무덤’이란 게 있다. 토요토미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죽인 조선 병사의 귀를 잘라오라고 명령해서 일본 병사들이 가져온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다. 끔찍해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귀가 아니라 코를 잘라온 것이고 병사의 코뿐만 아니라 양민의 코까지 잘라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극악무도한 명령을 내리는 권력자를 정상인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이순신의 활약과 명나라 원군의 출병으로 고착상태에 빠져있던 전쟁은 토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퇴하고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났다 해서 조선인의 자존파괴, 비통, 원망, 저주… 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없다. 그것들은 조선인, 한국인들에게 공유되어 집단정서로 정착되어왔다.

조선 침략을 반대하던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잡자 나름대로 전후처리를 위해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그 결실의 하나가 조선통신사 왕래의 재개이다. 다만 조선통신사는 정치적, 외교적 측면보다 문화・지식교류의 측면에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다수의 통신사들이 긴 여정 속에서 일본인들과 만나 문화적, 지적 대화를 나누었고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존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후처리에 임하는 조선 정부의 자세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정부는 당파 대립의 구도를 바꾸지 못했고, 민중의 집단정서 위에 들떠있는 상태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의 귀환 등 실질적인 대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던 정부(왕실)가 전후에도 제 백성 찾기에 소홀했던 것이다.

토요토미의 침략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0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또다시 국가에 의한 범죄가 저질러졌다.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역시 분별 없는 침략행위였다는 점에서 임진왜란과 다를 게 없다. 하나의 독립 국가를 식민지화하는데 객관적으로 납득할 만한 분별이 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도 암암리에 지켜졌던 룰 같은 게 있었다. 첫째, 바로 이웃나라를 식민지화하지 않았다. 둘째, 기존의 주권적・문화적 심볼을 존중하는 예우를 갖췄다. 그런데 일본은 어찌했는가. 몇천년을 함께 발전해온 이웃나라을 식민지화하면서, 주권적 심볼인 왕비 즉 당시 규범상의 국모를 살해하고, 문화적 심볼인 언어와 이름까지 빼앗았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패전 후의 일본의 사후처리다.

식민지화로 한반도사회가 입은 가장 근원적인 피해는 한반도의 역사, 인간관계-사회, 문화, 지역…이 동강동강 단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지속성과 변화의 조화가 완전히 깨져버렸고, 한반도 안의 사람들 사이・반도와 열도 사람들의 사이・남자와 여자 사이・계층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대중과 지식인들 사이…의 모든 신뢰의 규칙들이 흐트러져버렸다. 인간성의 상실과 실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형성의 전제조건인 집단 구성원의 지속적인 학습의 공유가 불가능해졌다. 뿐만 아니라, 지역, 특히, 남북이 동강나고 말았다. 한반도사회의 이 단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사후처리의 요체였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단절을 조장하는 일만 해왔다. 역사를 점점 꼬이게 만들고, 인간회복의 요구에 거짓과 외면으로 대처하면서, 지역의 단절을 부채질하고 고착시키는 정책을 고수해온 것이다. 그리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의 안정을 사후처리의 중심 과제로 삼아왔다.

사후처리는 일본만의 힘으로 안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국제관계, 특히 냉전체제하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한국 정부의 협력과 역할을 기다려야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국가의 사후처리에 임해온 자세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생긴 단절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모든 역사를 계승한다고 자처한다. 그렇다면 조선이 버려 반도의 사람들과 단절되어버린 동포, 조선의 부조리와 무능 때문에 버려져 반도 사회에서 단절된 여인들을 맨먼저 거두고 보듬어야 할 책무는 당연히 한국 정부가 짊어져야 했던 게 아닌가. 스스로 지어야 할 짐은 챙기지 않고, 집단정서에 편승해서, 또는 집단정서를 자극하면서, 모든 책임을 일본 정부에만 묻는 한국정부를 도저히 칭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권력자들도, 일본의 권력자들과 똑같이 자신들의 권력채제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한일관계를 이용해왔을 뿐이다. 합리적이고 올바른 사후처리를 통해 식민지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방향 찾는 촉수를 잃은 한일 양국의 정부(권력)와 달리, 두 지역의 사람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향상시키고 더불어 문화 발전에 애써온, 가까운 이웃이기에 공유할 수 있었던 경험을 살려 노력해왔다. 경제협력, 기술이전, 지식・정보・스포츠 교류… 그리고 젊은이를 중심으로 하는 팝・컬쳐의 바람은 그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련데 거기에 또 국가 권력이 끼어들어 판을 깨고 말았다. 어떤 긴박한 상황에서도 최종적 책임자로서, 조정자로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세련된 발신을 해야 할 양국의 수뇌들이, 집단정서의 에너지화만 노려 가볍게 행동하고 토라지고 유아적 역사관을 펴는 따위의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결국 한일 두 나라, 지역의 사람들을 '원초적'인 상호증오라는 한계상황에 빠지게 한 것은 국가권력이다. 특히, 앞에서 비쳤던 것처럼, 일본에서 갑자기 이런 상황이 전개된 데에는 우려할 만한 구조적 배경이 있다.

첫째, “잃어버린 20년”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일본은 오랫동안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시도한 구조개혁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고용체계를 무너뜨리면서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켜 가난하고 자신 잃은 소외자가 양산되고 말았다.

둘째, 중국의 대두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상대적으로 격하되고, 센카쿠(尖閣)제도(Diaoyu Islands)를 둘러싼 중국과의 마찰 과정에서 무력감, 자신상실, 열등의식이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셋째, 3.11 동일본 재해로 불안과 상실감이 증폭되었다. 당시의 집권당 민주당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사회적 신뢰와 연대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넷째, 일본의 장기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본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결집된 정당이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해관계의 구조가 바뀌면서 자민당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특히 2009년 야당으로 전락하자 탈당자가 속출하는 등 자민당의 와해까지 입에 오르게 되었다. 2013년 재집권에 성공하지만 자민당은 이미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당내 파벌의 붕괴 혹은 약체화로 각계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능을 잃었고 따라서 당내의 다양성, 견제와 균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정치지도자의 빈곤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다섯째, 사회기능의 분화라는 측면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해온 일본에서 한방향으로의 바람이 강해지자 사회기능이 더욱 움추러드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비판능력은 바닥을 보이고, 특히 비판을 대변해야 할 언론 미디어마저 움추러들어 비판이라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아니,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름답게 퇴진했다고는 볼 수 없는 총리가 컴백할 수 있었고, 한 목소리만 내는 폐쇄적인 밀착 권력집단(내각)을 만들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 체제는 “진구코고(神功皇后)”(일본이 패전 전까지 소학교 교과서에 싣고 있었던 신라를 정벌했다는 황당무계한 가공물)라도 재등장시키려는 듯한 터무니없이 유치한 역사관밖에 갖지 못한 채 군국주의의 부활을 위해 저돌적으로 매진하고 있다. 배타적 국가주의 체제인 것이다. 이런 권력체제가 등장하자 그 체제로부터 자신들의 것과 같은 역사관, 같은 국가관, 같은 가치관을 읽어낸 소외되고 배타적인 밀착집단들이 표면에 나타나 종가집단의 의사를 대변이라도 하듯 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바로 Hate Speech다. 이것이 비판 없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혐한론과 같은 '한계상황'은 이렇게 체제집단과 그 주변에서 파생한 밀착집단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만든 혐한은　자연발생적으로 널리 공유되고 있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의사(疑似) 집단의식일 뿐이다. 일본인의 양식이 기지게를 켜고, 일본 사회의 비판 능력이 되살아나는 날 인공적인 가짜 집단의식은 거품처럼 사라지리라 믿는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