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오 / 전 호주국립한국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커뮤니케이션 박사]

누구에게 물어봐도 우리 민족이 먼저 생각해야 할 국가적 아젠다를 줄여서 말한다면 경제 발전, 국가 안보, 조국 통일 등이 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도덕성 회복과 사회통합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금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해방 후 우리가 지나온 족적을 찾아보고 앞으로 제2 또는 제3의 건국(제2의 건국은 이미 오래 전에 써먹은 구호이므로)을 단단히 준비하자는 말, 말, 말들을 추려 보면 모두 위 서너 가지 큰 과제 안에 있을 것입니다.

전파를 타고 오는 고국의 텔레비전 보도를 보니 장래를 다짐하기 위하여 펼쳐진 금년 기념행사는 어느 때보다 풍요에 걸맞게 화려했던 것 같습니다. 8월 15일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국민대합창 대회에 참가한 그 많은 단체들, 그 외 70주년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매체 프로그램, 불꽃 축제, 각종 공연, 구국 기도회, 통일 모임, 전시, 무료 관람 등 다양했지요.

이러한 행사들은 사회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고 애국심을 고취했을 수 있지만, 다른 것도 잘해야지 못했으면 일회용 팡파레(fanfare)로 끝날 공산 또한 큽니다. 과거 사례가 그랬으니까요.

시드니의 한 구석에 사는 저는 민족을 향하여 일갈(一喝)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리지 못합니다. 잔치는 끝났지만 이번 70주년에도 행사마다 통일이란 말이 방방곡곡에서 울렸으니, 다른 과제는 뒤로 미루고 통일에 대한 한 가닥 평소 소신을 적어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저의 통일론은 닳고 닳아 빠진 정치가와 이른바 전문가들의 그 것과는 좀 색 다릅니다.

왜 애걸복걸인가

마침 최근 햇볕정책을 몸소 실험한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과 후 모두 언론의 논조가 저에게는 대단히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방문 전에는 그녀가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을 만나게 될까 여부, 결국 못 만나고 온 게 아쉽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습니다. 남북한 간 경색 국면을 녹이고 정상회담까지 가자는 건데 그렇게 한다면 뭐가 될까요?

나이 어린 이 최고 통치자는 엉터리로나마 선거는커녕 21세기 대명천지에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3대째 세습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무서운 호랑이 등에 탄 곡예사입니다. 민주주의 정치가 여러 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최선인 것은 대통령이나 수상은 임기가 끝나면 평민으로 걸어서 권좌를 떠나올 수 있다는 점입니다.

김 위원장에게는 그런 럭셔리가 없습니다. 정권을 놓치면 죽어야 합니다. 독재를 강화하고 긴장을 조성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친 고모부와 군 수뇌까지 처참하게 숙청하였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찾아가 독재를 그만 두라든가 인권을 존중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협상을 하자고 애걸복걸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자리를 굳혀 주기 위한 게 아니라면 말이지요.

과거 유화와 강경 정책 어느 쪽을 해도 엄청난 정력과 돈만 낭비했을 뿐 약발이 안 먹힌 이유입니다. 최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북한에 대한 이른바 4.24 제재 조치를 풀고 경제 교류를 부활하자는 대북 유화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성공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상황이 좋았던 과거에도 안 되었던 게 지금에 와서 하면 잘 될까요.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저는 6.25와 같은 동족상잔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럼 한국은 전쟁이 일어날까 봐 무서워 그쪽을 향하여 화해의 눈짓을 보내고 협상을 하자고 졸라대는 건가요? 그렇다면 상대를 긁고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과 행동은 일체 하지 말아야겠지요. 지금 전쟁이 나지 않는 것은 엄청난 국가 예산을 갉아 먹는 우리 자체의 군사력에다가 한미동맹이라는 또 다른 방어벽의 덕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그럼 당신은 통일을 하지 말자고 하는 건가? 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통일 방법론을 말해보고자 하는 게 이 글의 목적입니다. 그 방법론은 한마디로 절대적 체제우위론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우위가 아닙니다. 한쪽이 다른 쪽의 절대적 체제우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어 상대는 와해 (meltdown, 녹아내려)될 수밖에 없다는 시나리오입니다. (자세히 다루자면 책이나 긴 보고서를 써야 하지만 그렇게 못합니다.)

한 때 한국에서 흡수통일론이 한창 떴었습니다. ‘김치국 먼저 마시는’ 경솔한 통일 모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은 대박이니 뭐니 하는 것도 샴페인 꼭지를 너무 빨리 터트린 또 다른 사례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흡수할 만큼 체제우위가 확고히 성숙된 사회가 되기는 아직 멀었습니다. 더 오래 차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체제우위론은 매우 장기적 방안이며 비전 입니다.

그럴 여유가 없다고요? 아무리 급해도 마음대로 안 됩니다. 될 수 있다면 왜 이때까지 못 했겠습니까?

절대적 체제우위

그럼 본론입니다. 제가 보는 남한 또는 심지어 북한(길게 봐 북한의 체제가 남한보다 우위가 되지 말라는 범은 없지 않나요)의 체제우위를 결정 짖는 기준이랄까 변수의 첫 번째는 물론 누구나 아는 경제와 과학 기술입니다. 이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건 몇 가지 통계 수치만 봐도 남한은 압도적 우위입니다.

두 번째는 외교 안보입니다. 국방력에 대하여는 이미 말했습니다. 국제외교 분야에서도 정책과 재정, 지지 국가, 외교 인원, 해외 공관의 분포 등 모든 면에서 북한을 앞지르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정치 체제입니다.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서방 자유민주의 제도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습니다. 절차 민주주의 정치에 관한 한 크게 걱정 할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네 번째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매우 미흡하고 쉽게 되기가 어렵고 크게 걱정해야 할 게 이 분야입니다. 바로 사회통합입니다. 그것은 경제, 과학, 기술, 군사력, 외교와는 다른 좀 더 복잡한 개념입니다. 가장 근사한 개념은 국민간의 결속력입니다. 국민 간 그 게 잘 되려면 모두가 한 배를 탔다는 정서, 말하자면 일체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결속이 되는 것 아닙니까.

심각한 수준에 이른 빈부 격차, 팽배한 사회 불신, OECD국가 중 자살률 1등, 사회복지 혜택 꼴찌, 아마도 사기사건 1등과 같은 기록을 가지고 국민 간의 일치단결은 빈말이고 다른 걸 잘해도 체제우위는 속 빈 강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이 남남 갈등을 획책하는 것도 그런 틈이 많아 그런 것 아닌가요.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비교적 괜찮은 정치적 자유와 풍요를 부러워 할 건 틀림없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입니다. 지금은 휴전선으로 막힌 남 그 장막이 걷혀 자유 왕래가 허용되어 북한 인민들이 남한에 와 보고는 이게 한민족 전체가 바라는 통일 한국의 모델, 말하자면 코리안 드림이라고 자신 있게 느낄까요.

그럴 정도로 대한민국의 체제우위가 누가 봐도 확실하고 굳건하다면 북한은 스스로 와해되고 통일은 평화스럽게 다가오리라고 확신합니다. 더욱 남한의 체제우위가 그렇게 절대적이라면, 그리고 그게 주변 4강대국 모두에게 이익이라면 어느 나라도 통일을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지금 대한민국에 와 공장 노동자나 다른 잡부, 파출부, 간병인, 심지어 몸을 파는 탈북민과 족선족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이승만 대통령이 부르짖었든 무모한 북진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이 단칼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강한 대한민국을 의미하는 사회통합을 먼저 이룩하도록 착실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북한 정권이 몇 년 내에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나 그렇게 되면 통일은 금세 올까요? 우리의 체제가 지금과 같다면, 그리고 북한의 몰락 후 힘의 진공을 메우기 위하여 중국이 군사력으로 개입한다면 해방 공간 같은 아나키 상태 (anarchy, 무정부)는 불 보듯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땅은 두 동간이 아니라 셋, 넷으로 쪼개질 수 도 있습니다. 이라크, 시리아식 내전이나 한국 판 IS가 발호 안 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미국은 그런 가능성보다 영원한 분단을 택할 것입니다.

착실하게 준비하는 인내심을 말하자니 독일이 떠오릅니다. 전문가들은 통독과 관련, 우리와 달랐던 그 나라의 여러 사례를 듭니다. 예컨대 독일은 우리가 겪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이 없었고 사회적 시장경제가 믹스된 서독의 자본주의와 동독의 사회주의 간에는 유사성이 많다 등이 그것입니다.

독일인의 인내심

저는 거기에다 독일 민족의 인내심을 추가합니다. 오래 전(1976년) 저는 서독 정부 초청으로 그 나라를 한 달간 돌아보면서 배운 게 많은 데 그 중 하나는 평온한 베를린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수도였던 이 도시를 2차대전 후 한쪽(동백림)은 구소련이, 다른 한쪽 (서백림)은 4개 연합국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방문 계획에 따라 초청된 우리 그룹(저 말고는 모두 외국인)은 서방 점령지역 군정장관과 면담을 갖게 되었는데 저는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독일 땅(그것도 수도가)이 외국의 지배하에 있어도 독일 국민은 어떻게 조용할 수 있는 가였습니다. 말하자면 왜 반외세 군중 데모가 없는가 입니다.

그 당시 우리는 서독에 갈 때는 국적기인 루프트한자를 타고 갔습니다. 그러나 서백림에 들어갈 때는 제3국 비행기(미국의 팬암)를 타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만큼 베를린은 철저하게 남의 나라 땅이었습니다. 그 수모를 45년간 참고 준비한 결과 통일이 온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4.19 학생 운동으로 이른바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졌습니다. 오래 만에 찾아 온 민주화의 봄은 짧았습니다. 그 사이를 못 참아 남북협상을 하자며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학생들과 그에 따른 사회 혼란을 빌미로 5.16 군사정권이 탄생했습니다. 그때가 남북협상이 가당한 시기였을까요?

박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민주화의 봄이 또 한 번 찾아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반독재 세력에 대한 저항이 새로운 군부독재를 키우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소요와 정변은 통일의 길을 앞 당기보다 늦추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장기적이고도 종합적인 통일 정책을 올바르게 세우고 인내심으로 그 정책을 향하여 꾸준하게 준비하는 민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통일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통일의 구호를 크게 외쳐 통일의 열의만 뜨겁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통일이여 오서 오라고’ 전 국민이 일제히 노래를 부른다고 달라지겠습니까. 일회일비 적과 치고 받고 이긴다고 될 일도 아닙니다. 경제와 군사력 하나에만 의지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남북과 심지어 해외 동포 누구나가 이게 한국의 장래가 되어야 한다고 지지하는 나라 모델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한국과 해외 한인들의 통일에 대한 그런 시각과 움직임이 존재하고 있나요? 오히려 중구난방이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