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택 / 영화감독

2006년에 중국에서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다. '무극'이란 제목의 판타지 액션물로 당시 거장으로 알려진 첸카이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일찌감치 칸 영화제에서 대상도 탔고 장이머우와 더불어 중국 5세대 감독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원래 무극의 기획의도는 한·중·일에서 각각 유명 스타들을 캐스팅해, 단지 중국만이 아닌 아시아 전체를 시장으로 삼겠단 거였고 그에 따른 제작비의 규모도 수백억 원에 달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나와 영화 '친구'를 찍어 상한가를 올리던 장동건이 캐스팅되었고, 중국은 장바이즈(장백지), 일본에서는 사나다 히로유키라는 스타가 참가해 고생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일본 남자배우 중국서 푸대접
과거 주변국 침략이 원인 제공

여전한 군국주의 역사 왜곡
자국 문화산업 열도 고립 자초

일본 정계, 과거사 반성 없어
스타들 박수 받는 기회 요원

드디어 시사회 날.

중국 스타일의 엄청나게 큰 극장에 2천 명이 넘는 관객들이 들어찼다. 무대에 선 감독과 배우들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했다. 장동건이 통역을 통해 한국어로 영화 출연에 대한 소감을 밝힌 후, "셰셰!" 하고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바로 그다음이 일본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의 차례. 초반부터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지 그는 일부러 중국말로 인사를 준비해 왔다. 열심히 혀를 굴려 자신을 소개하고 함께 작업한 한·중 배우들과의 우정을 이야기한 뒤 마지막에 큰 소리로 "셰셰!" 하고 외쳤다. 그런데 웬걸. 객석의 사람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수 초 동안 그야말로 어색함과 민망함으로 가득한 극장 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감독이 얼른 상황을 수습하려고 배우들을 데리고 무대를 내려왔다. 내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장동건 또한 당시의 난감했던 순간을 회상하느라 미간에 진한 주름이 생겼다.

어쨌든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자 사람들은 조용히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고 감독과 배우들도 극장에서 마련해 준 중간 좌석에 앉아 함께 영화를 봤다. 아무 탈 없이 영화가 3분의 2쯤 지났을 무렵. 영화에선 정의의 편에 서서 활약했던 일본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가 멋진 활극을 벌이다 악역을 맡은 중국 배우의 칼에 찔려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순간, 갑자기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큰 극장 안이 중국 관객들의 손뼉 소리로 가득 찼다. 당황한 감독과 장동건이 옆에 있던 일본 배우를 보자, 이미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착한 장동건이 따라 나와 극장 밖에서 손을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일본 배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영어로 조심스럽게 괜찮으냐고 물어보자 그는 눈에 핏대가 선 채 입을 열었다. "이젠 죽어도 이놈의 중국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 장동건이 그의 심정을 헤아려 다시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이건 당신이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

장동건의 말이 옳다.

그건 그 일본 배우의 잘못이 아니라 과거 주변국들을 괴롭혔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잘못 때문이다. 게다가 반성은커녕 지금까지도 교과서를 왜곡해 역사적 진실을 가르치지 않는 일본 정부의 잘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신의 선배들이 저질렀던 엄청난 만행을 배운 적이 없는 일본 배우로서는 지금 당장 자신의 처지가 억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류(日流)'는 없는 거다.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는 결국에는 스타 비즈니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일본의 스타들은 열도를 벗어나면 생김새나 문화가 비슷한 아시아의 어느 국가를 가도 결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일본 자체의 엔터테인먼트 시장 규모가 제법 크기 때문에 괜히 고생스럽게 아시아나 해외로 진출할 노력도 별로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제 연간 70조 원이 넘고, 2018년 이후로는 미국보다도 더 커질 중국 영화시장에도 아무런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몇몇 일본의 기획사는 차라리 한국으로 자본을 가지고 들어와 한국 배우들을 중심으로 중국 시장을 겨냥한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리기도 하지만 그 역시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얼마 전에 무극의 일본 배우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일본 스타들 가운데 몇몇은 나중에 다시 따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참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진정한 과거사 반성이 없는 현재의 일본 정치인들이 있는 한 일본의 젊은 스타들이 주변국의 무대에서 박수 받을 일은 갈수록 요원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