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삼 / 재중동포 작가

끝내는 다시 상해로 돌아간다. 어린 것을 데리고… 원래 그녀는 상해 사람이 아니다. 먼 북방의 작은 시골 사람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들이 대량 남방으로 진출하는 기회에 젊은 그도 남방의 모 합자기업(合資企業)에 취직하여 근로자로 일 하면서 그곳에 가 있는 한 총각과 눈이 맞아 사랑을 속삭이이다 결혼까지 하여 상해에서 살림을 차렸고 후에 자식까지 갖게 된 것이다.

자식이 크면서 조선족의 후예이니 우리말과 글을 배워야 한다는 사명감과 고향 가까이 와서 살고 싶은 생각에 자신이 키우던 자식을 이곳 북방의 어느 작은 도시에 사는 친정엄마에게 맡겼다. 그곳에서 한족유치원에 다녔기에 이곳에 와서도 한족유치원이 어떨까? 조선족유치원이 어떨까? 고민하다가 민족심이 강한 친정엄마께서 종자가 종자고 핏줄이 핏줄이라고 우리말과 글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조선족 유치원에 보내 우리말과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워낙 총명한 아이여서인지 아니면 외할머니께서 의식적으로 제대로 된 우리말을 배우기 위해 아이에게 한국에서 방송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여주어서인지 의외로 우리말을 잘한다. 어찌나 잘하는지 때론 배워주지 않은 말도 엉뚱하게 곧 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귀여움을 더 받았다.

한번은 내가 그 집에 놀러갔다 돌아올 때였다. 아마 TV 드라마를 보고 배웠는지 날더러 살펴가란다. 이제 네살배기 어린것이 아주 어른스러운 말이다. 드라마만 방송되면 눈이 뚫어져라 보기에 저게 뭘 알아서 저렇게 열심이 보랴했더니 그게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 언어의 천부적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젠가 TV에 나오는 장면을 보고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물으니 “나는 못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또 한번 놀랐다.

그런 말들은 어른들이 배워준 말이 아니고 아이가 TV를 보고 배운 말인데 이런 때는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대견스러웠다. 그렇다하여 중국어가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중국어는 또 중국어대로 잘했다. 게다가 지금 조선족 유치원에서는 중국어와 우리말 그리고 영어까지 배워주기에 영어까지도 할 줄 안다.

허나 여기에 만족할 부모는 없다. 이런 곳에 있으면 교육환경의 차이로 인재로 자랄 수 없다고 상해라는 굴지의 대도시에 가서 자식을 뛰어난 인재로 만들기 위해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조선족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그래서 조선족학교가 없는 곳이니 애는 부득이 한족유치원에 다닐 것이고 그러면 아이는 그동안 외할머니와 학교에서 배운 우리말을 다 잊어버릴 것이다. 대신 월등한 현대교육을 받아 인재로 될 것이다.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가? 민족하고 인재도 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먼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지금 자식의 장래를 두고 이런 고민을 하는 부모들이 많다. 중국이란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이제 상해에 가면 어릴 때부터 아이를 인재로 만들기 위하여 피아노, 수영, 그림, 영어 등 모두 가르칠 작정이란다. 그렇게 소원대로 인재가 되면 몰라도 인재도 못되고 우리말도 글도 모른다면? 우리말과 글이라도 착실히 배워 예절 바른 아이가 되면 부모에게 좋을 것이고 혹 한국이란 나라에 가 있게 되더라도 언어사용에 불편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정체성 같은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고 요즘 중국의 어떤 조선족 부모들은 자식들이 인재가 되어 돈을 많이 벌 것만을 바라고 있다.

지난해 말, 나는 미국에 사는 딸의 초청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내 딸이 살고 있는 주위엔 유학 간 한족들이 많이 사는데 내가 놀란 것은 그들의 굳건한 민족심이다. 자녀들을 영어 학교에 보내 학교에서는 미국 아이들 못지않게 영어를 구사하지만 집에 와서는 꼭 중국어로 말하게 하여 중국에서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일 우리 민족 아이들 같으면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많은 부모들이 민족 언어를 언녕 집어치우고 집에 와도 영어를 하게 했을지 모른다.

개혁개방으로 우물 안에 갇혀 살던 조선족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 가서 노동자가 기업인이 되고 초가집 대신 아파트에서 살고 흙 대신 시멘트 포장도로를 밟으면서 새로운 문명시대를 접하였다. 허나 그 대신 민족공동체가 해체되고 민족의 구심점인 문화를 잃게 되었다.

지금 남방의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조선족 자녀들이 우리말과 글을 모르고 있는가?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는데다 집에서까지 가르쳐주지 않아 민족 언어의 문맹이 되고 있다. 언젠가 청도에 산다는 한 어린 것을 데리고 온 할아버지, 할머니를 봤는데 아이가 우리말을 못하기에 부득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투른 중국어를 하느라고 끙끙거리며 아이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대신 자신이 조선족이면서도 조선족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데 오히려 명석한 한족들이 걱정해주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교육국의 책임자가 나에게 “너희 민족 아이들이 같은 민족끼리도 민족어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어만 하는 것을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선족이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중국은 56개 민족이 아니라 55개 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민족의 장래를 두고 걱정하는 민족 간부들이 몇이나 되는가? 어떤 민족간부들은 자신이 조선민족이면서도 조선족들이 모인 장소에서 오히려 자기 민족 언어,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중국어를 한다.

이러한 성향은 모국인 한국에도 더러 있다. 민족의 말과 글보다는 한문이나 영어를 더 중시하여 거리의 간판이 온통 섞인 말투성이다. 신문은 말할 것 없고 심지어 공영방송에까지 외래어가 범람한다. 경제가 발전하여 세계 속에 당당한 위치를 가지면 가질수록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민족 정체성의 현주소이다.

그렇게 볼 때 유태인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들은 2천년 세월 조국 없이 떠돌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굳건히 문화를 지켜 모래땅에서 굴지의 기적을 일으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으니 그들의 특이한 그 민족 자긍심은 명석한 두뇌와 막대한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다.

한민족이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결코 인구의 숫자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브라질의 정글 속에 모여 사는 부족들같이 열린 세계와 마주보고 살면서도 독자적인 자기 문화를 그냥 보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13억이란 대민족속에 고작 200만, 창해의 일속같이 적은 민족이지만 민족자부심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말과 글을 포함한 민족정체성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정도 많고 똑똑하고 밝은 민족이지만 우리민족은 가변성이 너무 많다. 그것은 지금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조선민족들을 봐도 알 수 있다. 중국에 살면 한족으로 러시아에 살면 러시아인으로 미국에 살면 미국인, 일본에 살면 일본인, 순발력 있고 현지인들과 조화를 잘해서인지 곧잘 어디에 가면 어디의 민족으로 변질한다. 설사 실속은 그렇지 않다 해도 껍질만 남은 민족이 된다. 그 절대적 표현이 말과 글의 상실이다. 진정한 조선민족이라면 민족의 핵심인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의지와 용기와 신념이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오늘 중국 조선족은 언어사용에서 새로운 갈림길에 놓여있다. 민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일부러 한족학교에 보내는 부모가 있는가 하면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엄마가 한족인 손자를 데려다 키우면서 말과 글을 배워주고 민족학교에 보내는 부모도 있다. 이제 상해로 간 저 애도 우리말은 점차 잊게 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똑똑한 후손 하나가 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 중국의 조선족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