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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제 반일·혐한은 한계상황인가?-인간의 삶과 국가의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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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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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정 / 일본 류코쿠대학 명예교수

 

1.한계상황의 연출

   
 

사람들의 만남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서 여러분과 만나게 된 것은 이구홍 이사장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우연이 아닐지 모르지만 이사장님과의 만남은, “한일 지식인의 대화”를 준비하기 위하여 서울에 왔을 때 우연히 이루어졌습니다. 뵙고 몇 마디 말씀을 나누다보니 제 고향 선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공간에서 살아온 이사장님과 저의 두 집안 사이에는 밝고 아름다운 로맨스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둡고 불행했던 일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연과도 관계 없이 이사장님과 저는 의미있는 대화를 해오고 있으며, 유익하고 창조적인 앞일들을 상의해 갈 것입니다.

고향이라는 공간도, 과거라는 시간도, 뒤얽혀 있었을지 모르는 사연도 이미 “추상화”되어버렸고, 지금 우리들은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해(利害)와 힘의 논리보다 인간이라는 공통분모의 논리가 우선하여 서로 나누고 아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차원에서는 (인간)공통분모의 논리가 작용하지 못하거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쉽사리 변질되는 것 같습니다. 공간, 시간, 사연들의 추상화도 어려워 공간은 벽을 만들고, 시간은 앙금의 두께를 더하여 불투명성을 증가시킵니다. 그리고, 사연에는 새로운 사연들을 보태어 얽히고 설키고 때로는 사실을 왜곡도 시킵니다. 배타적인 힘의 논리가 우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만 보더라도 어떤 논리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은 어디서 무엇이 뒤틀렸는지 서로 미워하고 헐뜯기에 바쁩니다. 일부의 목소리이기는 합니다만, 두 나라는 “원초적”으로 서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이이고, 아무도 영원히 이 관계를 돌려놓을 수 없다는 양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반일(反日)과 혐한(嫌韓)은 그야말로 “한계상황”(1)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두 나라 사이가 좋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호전되는 듯했던 관계가 갑자기 이상해진 것입니다.

1970년대 실시하는 각 나라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보면, 서로 짜기라도 한듯이 한국인은 일본을, 일본인은 한국을 싫어하는 나라 랭킹 2위로 꼽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일 양국에서 서로 호의를 갖는 사람는 역시 똑같이 5% 미만이었습니다. 그래도 지금처럼 살벌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의 분위기에서는 어찌 보면 일본을 동경하면서 미워하는 “애증증후군”(2) 같은 걸 엿볼 수 있었고, 일본에서는 싫다, 밉다 보다는 무관심이 주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1980년대 소위 한일간의 “교과서 전쟁”으로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지만 2000년대 들어서 축구 월드컵 공동 주최, 그리고 무엇보다「겨울연가」로 시작되는 한류 붐이 일면서 두 나라 관계는 놀라울 만큼 바뀌었습니다. 한류 붐이 한창일 때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호감도는 50%를 넘었고,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는 70%를 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현상이었습니다. 이 무렵 학생들을 인솔하고 서울에 와 명동에 들렀을 때 여기가 한국인가 일본인가 의심할 정도로 일본인만 보였고 일본말만 들렸습니다. 그만큼 한국을 찾는 일본인이 많았고 한일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일본 안에서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 한국 드라마, K-pop에 대해서는 제가 일본인한테 배워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썰렁한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엔가 살벌한 hate speech까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기 한국의 분위기 변화에 대해서는 특별히 들은 바 없습니다만, 대통령이 독도에 상륙했고 그래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는 소문만 들었습니다. 다만, 한국에는 좋은 세월 나쁜 세월 가리지 않고 반일의 무드가 늘 저변에 깔려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갑작스런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양국 관계가 험악해진 이후, 엔저 현상과 더불어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이 격감한 것에 비하면, 일본을 찾는 한국인은 줄기는 커녕 증가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국의 「반일」이란 무엇인가? 「반일운동」인가, 「반일행동」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최근의 한일 관계의 급격한 변화는 일본에서 더 확실하게 나타난 건 사실입니다. “저질” 이외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혐한론, 반한론(反韓論), 악한론(惡韓論)이 기세를 올렸고, 그런 따위의 책을 쓴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다고도 하고, 그런 따위의 기사를 싣지 않으면 주간지가 팔리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조금은 진정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분위기에 변함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일본인 모두가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아닙니다. 일부의 “혐한 장사꾼” 혹은 “사이비 애국집단”의 연출에 의해 만들어진 한계상황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재특회(在特会)」라는 단체입니다. 그들이 바로 Hate speech의 주범들입니다. 그들은 재일 조선인, 한국인에게 “특혜”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인, 한국인은 모두 적이다. 일본에서 꺼져라.”는 식의 극단적인 저질 언사를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2.재일동포들은 정말 특혜를 받아왔는가?

과연 재일동포들이 특혜를 받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재일 동포가 일본으로부터 특혜를 받았다면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자이니치”(3)의 역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재일 동포는 국가(일본뿐만 이니라 한국도 포함해서)로부터 버림받아 온 존재입니다.
재특회가 특혜 운운하는 것은 재일 동포들이 특별영주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재일 동포들이 특별영주권을 갖기까지의 경위를 보면, 거기서 바로 재일 동포들의 서럽고 고통스러웠던 역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4) 

청일전쟁, 러일전쟁 이후 타이완, 사할린이 일본으로 넘어갈 때, 그 지역 주민의 국적 선택의 규정도 만들어졌었지만, 한국의 경우, 국가 그 자체가 송두리째 일본에 합병되었기 때문에 한반도 주민의 국적에 관한 규정은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고 합니다. 합병조약에서 한국의 영토 및 국민에 대한 통치권이 일본에게 송두리째 넘어갔다는 것을 승인했다는 것이지요. 이 조약에서 한반도 주민의 국적에 관한 규정을 두지 않았다는 것은, 합병이라는 국가 행위에 의해 한반도 주민은 자동적으로 일본의 국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이완에는 1899년부터, 사할린에는 1923년부터 일본의 국적법이 적용되었지만(일부 일본과 다른 부분이 있었음), 한반도에서는 그 국적법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한반도에서 국적법을 시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의 일본 국적법에서 인정하고 있었던 국적변경의 자유를 한국인에게는 부여하지 않겠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중국 국적을 취득해서 중국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한국인의 출현을 막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5)

일본은 신화나 조상조차도 같다는 식의 동화교육을 통하여 한국인의 “일본 국민화”를 획책합니다. 하지만 과연 일제 강점기의 우리 동포들은 「일본인」으로서의 대우를 받았을까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우선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여 「외지」인 한반도에서는 「내지」의 법률이 시행되지도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법률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행정명령에 의해 통치되는 「이법역(異法域)」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한반도의「일본인(본래 한국인)」들은 일본 국회(중의원)에 대표를 내보내는 기본적인 참정권도 행사할 수가 없었습니다.(6)  게다가 일본 호적과 조선 호적을 구분하여, 조선 호적에 기재되어있는 사람은 「내지인-정통 일본인」과는 달리 취급했습니다. 호적에 의한 “차별의 정당화” 근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일본이라는 국가는「속지주의(属地主義)」 원칙과 「속인주의(属人主義)」 원칙을 필요에 따라 바꿔 쓰면서 한반도의 주민을 제도적으로 차별했습니다. 국가의 행위에 모순이 있든 부조리가 있든 국가는 스스로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잔꾀를 모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한반도 주민들은 다시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일 동포들은 새로운 고통과 차별에 직면하게 됩니다. 종전 직후 재일 동포들의 국적 변동은 없었지만,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적국인」으로 취급되었고, 참정권이 무기한 정지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국적의 실효성은 없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 아래서도 점령사령부는 재일 동포를 「해방민족」 혹은 「연합국민」으로 처우하지 않고 일본국적 보유자로 보고 있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기본적으로 재일 동포의 전원 철수를 원했고, 점령사령부와 함께 “계획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당시 외무장관 요시다시게루(吉田茂)는 지방장관회의에서 “불량분자를 일소하고 소우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국, 타이완, 한국인을 철수시켜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조사, 등록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7) 이렇게 “계획철수”를 위한 조사, 등록이 실시되었고, 1946년 4월부터 재일 동포의 귀환이 시작 되었습니다.(8) 

1951년 9월, 한국, 중국 등 식민지 통치를 받은 당사국의 참가 없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조인되었습니다. 그리고, 1952년 4월 28일 조약이 발효되면서 재일 동포의 일본 국적은 완전히 박탈되었고 그들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려면 일반 외국인과 똑같이 귀화 절차를 밟아야만 하도록 되었습니다. 이는 영토 변경에 따른 국적 변동의 경우, 「국적 비 강제의 원칙」에도 어긋나고, 「주민의 자유의사 존중의 통례」에서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재일 동포는 이후 모든 법률적, 행정적 행위시에, 일본 국적의 소지를 요구하는 「국적조항」에 걸려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혜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국가의 정치적, 법률적(제도적) 부조리로 인한 차별과 편견에 힘들어해야 했고, 사회적으로도, 즉, 일상생활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예컨대, 재일 한국인의 어린이가 학교에 가면 “너희들은 미국, 영국이 독립시켜줬으니까 우리들의 적이다.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그때 식의 hate speech 에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니가타 현 경찰부가 1945년 9월 4일 내무성에 보낸 보고).(9)  

전후 일본인들의 좌절감, 패배감에서 나온 배타적 내셔널리즘의 발로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이와 같은 저질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정서를 다스려야 했을 국가가 오히려 이를 이용하거나 부채질했다는 사실에서 이성으로서의 국가와는 다른 또하나의 국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재일동포가 정치적, 법률적,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맺어지고, 1966년 「일본국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의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일본국과 대한민국간의 협정 실시에 따르는 출입국관리특별법(입관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이는1991년 모든 외국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제정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의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 관리에 관한 특례법(입관특례법)」에 흡수 통합됩니다. 이에 따라 재일 동포는 특별영주권을 갖게 되어 일단 일본에서의 거주권을 확보합니다. 그러나, 이는 「재특회」가 말하는 특혜일 수 없고, 재일 동포가 존재하게 된 경위로 볼 때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재일 동포는 지금도 취업, 사회복지, 정치참여(일본인과 똑같은 세금을 내면서도 지방 선거권조차 없음.) 등 많은 부문에서 차별 받고 있는 현실을 모를 리 없는 「재특회」의 배타적 억지일 뿐입니다.

여기서, 재일 동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또하나의 국가, 한국의 행위를 보아야 하겠습니다.(10)  

한국이 독립한 지 어언 70년. 이 70년은 재일 동포들의 버겁던 고뇌와 인고의 세월이기도 합니다. 재일 동포 문제는 어둡고 무거운 부(負)의 역사를 등에 업고 있으며, 일본은 물론 북한 등의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파생한 여러 요인이 얽혀 재일 동포 집단 그 자체가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대응하기 어려운 문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재일 동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은 한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민(棄民)”이며, 한국이 자신들의 존재를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법・행정상의 제도 설계에서 자신들을 소외시켜 “투명인간”(11)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현재 재일동포는 민단계(한국), 조총련계(북한),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One Korea 지향파 등으로 갈라져 있으며, 한국 국적을 가진 채 귀화한 이중국적자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민단계만을 재외국민으로 취급하여 그 외의 재일 동포는 입국 허가 없이는 한국에 올 수도 없습니다. 중국 거주의 동포(조선족)에 대해서는 지원까지 해주는 것과 비교하면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민단계의 재외국민들 역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본의 영주권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에서 주민으로서의 지위를 가질 수 없고, 따라서, 한국에서의 복지혜택, 취직, 융자 등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습니다. 재일 동포들은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으로부터도 차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재일동포들은 한국이 경제개발을 서두를 때 엄청난 자본 지원을 했었고, 88올림픽의 성공을 위해 성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그들의 존재를 경시 내지 무시하여 제도상의 차별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버려진 국민이라는 「기민」, 「투명인간」이라는 자학적인 의식을 갖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제주평화인권상 수상 연설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정부와 다른 견해의 발언을 했다 하여 고국을 말할 때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재일 동포 고령(90세)의 작가 김석범(金石範) 씨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 한국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고국, 고향을 생각하는 인간의 삶의 논리와 국가 행위로서의 통치의 논리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3. 인간 삶의 현장 한반도와 일본열도-문화적 유전자의 공유

딱딱하고 어두운 얘기가 길었습니다. 국가의 얘기를 하다 보면 그리 됩니다. 이제 인간의 얘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인간들이 어떻게 관계하며 살아왔는가로 말머리를 돌려보겠습니다.

고대 한반도에 나경(裸耕)의 습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쌍의 남녀가 벌거벗고 들일을 했습니다. 남자가 자루 달린 연장으로 밭을 일구면 여자가 뒤따라가며 일궈놓은 밭에다 구멍을 내고 다시 남자가 그 구멍에 씨앗을 넣었습니다. 그런 뒤 두 남녀는 그 밭에서 성교를 하는 것으로 밭일을 끝냈다는 것입니다. 성교는 풍작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도 같은 습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남녀가 알몸으로 모내기를 하고 그 논두렁에서 성교를 하는 걸로 그날의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성(性)이란 성(聖)스러운 생명의 원천이며 풍요를 약속하는 상징이라는 생각을 한반도의 사람도 일본열도의 사람도 함께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신토(神道)라는 토속신앙이 있고 이 신앙의 집전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진쟈(神社)라는 게 있습니다. 이는 일본에만 고유하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실은 이 진쟈의 원형이랄까 원시적인 형태가 한반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당”이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12) 

실제로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마을 주변에 서낭당, 산신당 같은 신앙적 성격을 띤 “당”들이 꽤 많았습니다. 절간에도 불교와는 아무 관계 없는 무슨 “당”들이 있었습니다. 불교가 토속신앙을 흡수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가 늦게 들어왔다면 한국에도 진쟈와 같은 종교적 시설이 생겼을지 모른다고 마음대로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또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간과 신을 매개하는 무당이, “미코(巫女・神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의식, 신앙, 사고방식을 공유해왔습니다. 문화적 유전자가 대단히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가까운 문화적 유전자가 일본에서의 한류 붐을 그토록 짧은 기간에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몰아갔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삶 그 자체를 함께 만들고 발전시켜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대륙의 선진 생산기술을 익힌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본열도에 건너가 이미 정착해 있던 주민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넓혀갔습니다. 소위 “도래인(渡来人)”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복수의 루트를 따라 따뜻하고 물 많은 젊은 땅을 찾아 일본열도에 건너가 그곳 원주민과 함께 삶을 창조해 갔던 것입니다. 예컨대, “하타우지(秦氏)”라 불리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상 경로로 일본의 호쿠리쿠(北陸) 근방에 도착한 후 다시 남진을 계속해 쿄토(京都) 근처(현재는 쿄토시내)의 우즈마사(太秦)에 정착하여 벼농사와 양잠을 시작했습니다. 하타 씨 집단은 이후 지금의 쿄토, 효고(兵庫) 지역에 걸쳐 크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 밖에도 호쿠리쿠에서 쿄토에 이르는 사이에 있는 비와코(琵琶湖) 주변에는 이와같은 도래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이 도래인들의 생산기술은 열도 사람 모두의 삶을 풍요롭게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도래인 중에는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지적 활동을 하는 인텔리들도 있었습니다. 예컨대, “아야우지(漢氏)”라 불리는 집단이 그것입니다. 일본이 대륙풍의 조직・제도를 도입하여 이의 운영・ 정비를 서두를 때 인텔리 아야 씨 집단이 크게 활약했던 것입니다.(13) 

이렇게 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은 일본열도의 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제도의 정비에도 큰 몫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한국이 일본에 생산기술과 지식을 전수했다고 우월감에 빠져 자랑하는 것은 매우 우습다는 점입니다. 도래인들은 자신들의 필요 충족과 꿈의 실현을 위해 열도에 건너가 열도의 사람들과 더불어 생산 고조에 힘을 썼고 열도의 사람들과 함께 사회 발전을 모색했을 뿐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특정한 국가의식, 더더욱 한국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실제로 하타 씨도 아야 씨도 스스로를 당시 아시아의 보편적 세계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즉, 세계의 진(秦), 한(漢) 씨라 칭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한 국가의 종속물이라는 의식보다 세계의 장인(匠人), 지식인이라는 프라이드가 더 중요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기술이나 지식의 전수를 자랑하기로 한다면 근대 서양 문물을 먼저 받아들여 발전시킨 일본이 한국에 전한 것도 당연히 인정하고 예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1980년대만 해도 한국 자동차 엔진의 주요 부품은 거의 일본 제품이었습니다. 일본 기업의 기술이전에 대한 이해와 협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삼성, 현대의 위상이 달라져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경우의 기술이전이나 전수 역시 국가주의 차원에서 볼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국가주의적인 우월감이나 교만은 우스꽝스럽다는 얘기입니다. 기술이전이나 전수에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경영과 장인의 논리가 우선되었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서로 지식과 기술을 나누고 믿음과 생각을 함께 해왔다는 걸 보면서, 지금과 같은 한일관계가 대단히 부자연스렵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한반도의 사람들과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문화적 뿌리를 공유하는 부분이 많고, 그러기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도 넓으리라 생각되는데 실제로는 피차에 소견 좁은 짓만 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지역의 사람들은 수천년 동안 서로의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온 실적을 갖고 있으며, 그 노력의 성과로 오늘날 이 지역이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성장해 있습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를 존중해야 할 터인데, 반일과 혐한의 한계상황적인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이 현실이 아무래도 부자연스럽습니다.
문화적 유전자의 근사성도 몇 천년간의 상호협력의 노력도 다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커다란 파괴의 요인이 어딘가에 숨어있는 걸까요?

 

4.국가의 범죄적 행위에 의한 관계의 파탄

사람들이 힘들여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쌓아온 관계의 탑을 파괴해온 것은 “국가”였습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가까운 만큼 예전부터 갖가지 충돌이 많았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왜구의 노략질도 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오랫동안 왜구의 준동이 계속되어 특히 해안의 민중들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좀 주의해야 할 것은 왜구가 곧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왜구라 해서 반드시 일본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해적도 아니었습니다. 한반도의 사람 중국 사람도 끼어있었고, 14~5세기에는 조선인이 주축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어에 아무리 떼쓰고 울던 애라도 듣기만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무쿠리코쿠리”(14)라는 말이 있는데, 무쿠리란 몽고, 코쿠리란 고려・조선을 말합니다. 일본을 침략한 몽고군과 노략질하는 조선 해적의 무서움을 전해주는 말입니다. 다만, 이들 해적의 근거지가 일본의 세토나이(瀬戸内), 큐우슈(九州), 츠시마(対馬) 등에 있었기 때문에 왜구라는 이름이 붙여졌을 뿐이며, 일본 안에서도 이들은 머리아픈 존재였습니다. 오다노부나가(織田信長)와 같은 강대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독재자도 이 해적들과 협상하고 힘을 빌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2014년도 서점상을 받은 소설 『무라카미(村上) 해적의 딸』은 당시 왜구의 세력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잘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왜구란 그 세력이 아무리 크고 그 피해가 아무리 광범위하게 미쳤다 해도 국가의 틀을 벗어난 해적이었습니다. 왜구가 한일 양국인의 관계를 한계상황으로 몰고갈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일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간 결정적인 요인은 국가의 범죄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일간에는 전설적이고 신빙성이 희박한 걸 제쳐놓더라도, 백제를 돕기 위하여 일본이 군사를 파견했다가 전멸한 사실, 고려조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왜구를 토벌하기 위하여 츠시마에 군사를 파견했던 사실 등 군사적인 국가 행위가 예전부터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일 두 나라와 사람들 사이를 결정적인 파탄으로 몰고 간 첫번째 국가적 범죄는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에 의해 이루어진 조선 침략(1592-1598)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일 두 지역 사이에서 일어난 국가간의 전면적인 침략전쟁은 이것이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특히, 이 침략전쟁은 대의명분이 없는 전쟁이었고, 잔학한 살상으로 인해 원한과 분노를 더더욱 증폭시켰습니다.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한 것은, 그의 일본 제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나누어줄 땅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드는 사람이 많지만, 침략은 논공행상이 이미 끝난 다음에 이루어졌고, 설령 그런 이유가 있었다 치더라도, 그런 일방적인 국내 사정으로 이웃나라에의 침략이 허용될 만큼 당시 아시아의 국제질서가 흐트러져있지는 않았습니다. 이 침략전쟁은 늙은 탐욕가의 망상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침략군을 편성할 때, 카토키요마사(加藤清正)와 같은 무장 실전파와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코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같은 사무적 실무파로 나누어 경쟁을 시켰기 때문에 조선인의 희생이 더 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쿄토 시내를 걷다 보면 쿄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귀 무덤”이란 게 있습니다. 토요토미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죽인 조선 병사의 귀를 잘라오라고 명령해서 일본 병사들이 가져온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끔찍해 소름이 돋습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귀가 아니라 코를 잘라온 것이고 그것도 병사들의 코뿐만 아니라 양민의 코까지 잘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극악무도한 명령을 내리는 권력자를 정상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순신의 활략과 명나라 원군의 출병으로 고착상태에 빠져있던 전쟁은 토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이 철퇴하고 끝이 났습니다. 전쟁이 끝났다 해서 조선인의 자존파괴, 비통, 원망, 저주… 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조선인, 한국인들에게 공유되어 집단정서로 정착되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선 침략을 반대하던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잡자 나름대로 전후처리를 위해 노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실의 하나가 조선통신사 왕래의 재개입니다. 특히, 조선통신사는 정치적, 외교적 측면보다 문화・지식교류의 측면에서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다수의 통신사들이 긴 여정 속에서 일본인들과 만나 문화적, 지적 대화를 나누었고 이 과정에서 최소한의 자존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후처리에 임하는 조선 정부의 자세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 정부는 전후에도 당파 대립의 구도를 바꾸지 못했고, 민중의 집단정서 위에 들떠있는 상태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의 귀환 등 실질적인 대책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던 정부(왕실)가 전후에도 제 백성 찾기에 소홀했던 것입니다.

토요토미의 침략전쟁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30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또다시 국가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범죄가 저질러졌습니다. 일본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화입니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역시 분별 없는 침략행위였다는 점에서 임진왜란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나의 독립 국가를 식민지화하는데 객관적으로 납득할 만한 분별이 있을 리 없지만, 적어도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도 암암리에 지켜졌던 룰 같은 게 있었습니다. 첫째, 독립적인 선린관계였던 바로 이웃나라를 식민지화하지 않았고, 둘째, 기존의 주권적・문화적 심볼을 존중하는 예우를 갖췄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어떠했는가. 몇천년을 함께 발전해온 이웃나라를 식민지화하면서, 주권적 심볼인 왕비 즉 당시 규범상의 국모를 살해하고, 문화적 심볼인 언어와 이름까지 빼앗았습니다.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패전 후의 일본의 전후처리입니다.

식민지화로 한반도사회가 입은 가장 근원적인 피해는 한반도의 역사, 사회, 문화, 지역 등의 구조적 관계가 동강동강 단절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역사 발전의 지속성과 변화의 조화가 완전히 깨져버렸고, 한반도 안의 사람들 사이・반도와 열도 사람들의 사이・남자와 여자 사이・계층을 달리하는 사람들 사이・대중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모든 신뢰의 규칙들이 흐트러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문화 형성의 전제조건인 집단 구성원의 지속적인 학습의 공유가 불가능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역, 특히, 남북이 동강나고 말아 민족간의 상호 부정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인간 스스로의 아이덴티티의 단절 현상이 일어나 자기 부정의 역사도 시작됩니다.

이 단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야말로 사후처리의 요체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런 단절을 조장하는 일만 해왔습니다. 역사를 점점 꼬이게 만들고, 인간회복의 요구에 거짓과 외면으로 대처하면서, 지역의 단절을 부채질하고 고착시키는 정책을 고수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이라는 국가체제의 안정을 사후처리의 중심 과제로 삼아왔습니다.
전후처리는 일본만의 힘으로 안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국제관계, 특히 냉전체제하에서의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 한국 정부의 협력과 역할을 기다려야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국이라는 또하나의 국가가 전후처리에 임해온 자세를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생긴 단절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가 묻고 싶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모든 역사를 계승한다고 자처해왔습니다. 그렇다면 국가(조선)로부터 버림받아 고국과 단절되어버린 동포, 국가・사회의 부조리와 무능 때문에 버려져 사회와 심지어 가족과도 단절되어버린 여인들을 맨먼저 거두고 보듬어야 할 책무는 당연히 한국 정부가 짊어져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스스로 짊어져야 할 짐은 챙기지 않고, 집단정서에 편승해서, 또는 집단정서를 자극하면서, 모든 책임을 일본 정부에만 묻는 한국정부를 도저히 칭찬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권력자들도, 일본의 권력자들과 똑같이 자신들의 권력채제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한일관계를 이용해왔을 뿐입니다.

 

5.한계상황을 조장하는 메카니즘

방향 찾는 촉수를 잃은 한일 양국의 정부(권력)와 달리, 두 지역의 사람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서로의 삶을 향상시키고 더불어 문화 발전에 애써온, 가까운 이웃이기에 공유할 수 있었던 경험을 살려 노력해왔습니다. 경제협력, 기술이전, 지식・정보・스포츠 등 인간 주체의 교류, 그리고 젊은이를 중심으로 하는 pop culture의 바람은 그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의 한일간의 따뜻한 관계는 결코 국가가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류 스타들, 스포츠 선수들, 그리고,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 일본인을 구한 유학생… 이들 개개의 인간들이 창조한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국가 권력이 끼어들어 판을 깨고 말았습니다. 어떤 긴박한 상황에서도 최종적 책임자로서, 조정자로서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세련된 발신을 해야 할 양국의 수뇌들이, 집단정서의 에너지화만 노려 가볍게 행동하고 토라지고 유아적 역사관을 펴는 따위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결국 한일 두 나라, 지역의 사람들을 “원초적”인 상호증오라는 한계상황에 빠지게 한 것은 국가권력입니다. 우선, 일본에서 느닷없이 hate speech와 같은 증오행위가 표출된 데에는 권력과 연계된 우려할 만한 구조적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 “잃어버린 20년”이란 말이 상징하듯이 일본은 오랫동안 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시도한 구조개혁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전통적인 고용체계를 무너뜨리면서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켜 가난하고 자신 잃은 소외자가 양산되고 말았다.

둘째, 중국의 대두로 일본의 국제적 위상은 상대적으로 격하되고, 센카쿠(尖閣)제도(Diaoyu Islands)를 둘러싼 중국과의 마찰 과정에서 무력감, 자신상실, 열등의식이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셋째, 3・11 동일본 재해로 불안과 상실감이 증폭되었다. 당시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는 동안 사회적 신뢰와 연대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넷째, 일본의 장기 집권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본래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결집된 정당이었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해관계의 구조가 바뀌면서 자민당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특히 2009년 야당으로 전락하자 탈당자가 속출하는 등 자민당의 와해까지 입에 오르게 되었다. 2013년 재집권에 성공하지만 자민당은 이미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당내 파벌의 붕괴 혹은 약체화로 각계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능을 잃었고 따라서 당내의 다양성, 견제와 균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정치지도자의 빈곤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다섯째, 사회기능의 분화라는 측면에서 후진성을 면치 못해온 일본에서 한방향으로의 바람이 강해지자 사회기능이 더욱 움추러드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비판능력은 바닥을 보이고, 특히 비판을 대변해야 할 언론 미디어마저 움추러들어 비판이라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상과 같은 상황에서, 아니,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아름답게 퇴진했다고는 볼 수 없는 총리가 컴백할 수 있었고, 한 목소리만 내는 폐쇄적인 밀착 권력집단(내각)을 만들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 체제는 「진구코고(神功皇后)」(15)를 입에 올리는 정도의 터무니없이 유치한 역사관밖에 갖지 못한 채 군국주의의 부활을 위해 저돌적으로 매진하고 있습니다. 배타적 내셔널리즘으로 무장된 체제인 것입니다. 이런 권력체제가 등장하자, 그 체제로부터 자신들의 것과 같은 역사관, 같은 국가관, 같은 가치관을 읽어낸 소외되고 배타적인 밀착집단들이 표면에 나타나, 종가집단의 의사를 대변이라도 하듯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가 바로 hate speech입니다. 이것이 비판 없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표현의 자유라는 것입니다.

일본에서의 혐한론과 같은 한계상황은 이렇게 체제집단과 그 주변에서 파생한 “혐한 장사꾼”들이 내셔널리즘의 옷을 입혀 만들어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만든 혐한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어 널리 공유하고 있는 정서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컨트롤된 의사(疑似) 집단정서일 뿐입니다. 일본인의 양식이 기지게를 켜고, 일본 사회의 비판 능력이 되살아나는 날 인위적인 가짜 집단정서는 거품처럼 사라질 게 틀림없습니다.

한국의 반일 역시 인위적이고 시위적인 성격을 띤 한계상황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의 반일 정서는 매우 복잡하여 알기 어려운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반일 정서는 원초적 내셔널리즘과 컨트롤된 내셔널리즘이 뒤섞여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민중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주변의 강한 세력 집단에게 시달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고,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함께 배타적 의식까지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원초적 내셔널리즘(proto nationalism)(16)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히,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는 이 원초적 내셔널리즘을 최대로 자극했다고 봅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허망감, 자존심의 파괴, 자기 존재의 부정 등 한(恨)의 정서가 공유되었고, 이 집단정서가 모든 사람의 가슴 깊이 침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단정서는 학습되어 세대를 넘어 공유되어왔습니다. 얻어맞은 아픔의 기억은 길어도 한 세대로 잊혀지지만, 자기 존재를 부정당한 아픔의 기억은 몇 세대가 지나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반일의 정서가 잊혀지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 이 원초적 내셔널리즘을 컨트롤하는 세력들이 나타납니다. 우선 국가권력이지요. 우리가 독립하면서 줄곧 실시해 온 일민주의, 단일민족, 근대화・민족적 민주주의 교육, 반민족자 색출 등은 모두 원초적 내셔널리즘이라는 집단정서를 이용하고 컨트롤하여, 거기서 통치의 에너지를 도출해내려는 국가의 행위였습니다. 또 국가권력의 주변에는 네이션(민족)의 의상으로 치장한 권력 지향 집단들이 모여듭니다. 이들이 바로 “반일 장사꾼”들이죠. 이 부분은 일본의 “혐한 장사꾼”의 대두 메카니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기까지의 말씀으로 대체로 확인이 되었으리라 믿습니다만, 한일간의 비뚤어진 관계, 반일・혐한이라는 구도는 단순히 한국사람, 일본사람의 집단정서가 표출되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몰아간 것은 국가였고, 그때마다 삶에 충실한 사람들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으며 그것이 한의 정서로 침전되어왔습니다. 그 한의 정서를 “국민정서”로 컨트롤해온 것이 국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권력의 주변에서 자란 “반일 장사꾼”・“혐한 장사꾼”이 “국민정서”라는 피켓을 들고 반일・혐한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컨트롤된 내셔널리즘이 만들어내고 있는 한계상황입니다.

원래 내셔널리즘이란 무정형(無定形)의 “집합무의식(集団無意識)” 같은 것이어서 어떤 모양새로라도 변형시킬 수 있는 감성의 덩어리라서 인화성(引火性)이 높다고 하지요. 그래서 부채질하기도 좋고 컨트롤하기도 쉽습니다. 반일의 불꽃이 타오를 땐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잖습니까?

혐한의 불꽃-hate speech가 한창일 때 일본의 분위기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혐한 장사꾼”이 더욱 볼상사나운 것은 제 나라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생긴 패배감, 제 나라의 실정(失政) 때문에 생긴 패색감(閉塞感)에 유래하는 서민의 한을 내셔널리즘화시켜, 새로운 삶의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재일 동포를 공격해왔다는 점입니다.

국가는 이성입니다. 국가는 이성의 주체가 되도록 꾸며지고 운영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권력이라는 욕망의 그릇이 되었을 때 인간들의 삶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고, 꿈 대신 희생을 안고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전형적인 실례를, 저는 재일 동포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이성의 주체입니까?


-각주-

(1) 한계상황(限界状況)이란 칼 야스퍼스(K.Jaspers)가 말하는 Grenzsituation을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피할 수도 컨트롤할 수도 없는 죽음, 질병(고뇌), 경쟁,사랑 (미움)을 한계상황이라고 합니다. 

(2) 에토신키치(衛藤瀋吉-도쿄대학 명예교수)는 1970년대 한국인의 대일 의식을 설명할 때 애증증후군(愛憎症候群‐love hate syndrome)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3) 일본에서 재일 동포를 흔히 자이니치(在日)라 부릅니다. 재일 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코리안과 함께 혼용되고 있습니다.

(4) 다음 자료를 중심으로 재일 한국인이 특별영주권을 갖기까지의 경위를 살폈습니다. 遠藤正敬(2013)『戸籍と国籍の近現代史』明石書店・殷勇基(2015)「韓日関係の発展的課題と展望」日韓正常化50周年記念国際学術大会『日韓関係改善のための識者の対話の場』東京学芸大学·東北亜歴史財団·BOA pp.142~154

(5) 遠藤正敬 앞책pp.167~170

(6) 殷勇基 앞책p.146

(7) 森田芳夫(1955)『在日朝鮮人処遇の推移と現状』(法務研究報告書第43集第3号)法務研修所 p.75 

(8) 조사, 등록 결과, 재일 한국인 총수 647,006명, 귀환 희망자 514,060 명이었는데 1946년 말까지 실제 귀환자는 82,900 명이었습니다.(遠藤正敬 앞책 p.237)

(9) 『内鮮関係書類編冊 昭和20年(1945)主務省報告 特高課』国立公文書館所蔵3A-15-00 (遠藤正敬 위책 p.233 재인용)

(10) 이 대목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 자료를 중심으로 살핍니다. 金雄基(2015)「韓国国民としての属性を持つ存在としての在日コリアン‐日本における権益伸張における限界と克服のための試論」日韓正常化50周年記念国際学術大会『日韓関係改善のための識者の対話の場』 東京学芸大学・東北亜歴史財団・BOA pp.115~126

(11) 趙慶喜「在韓在日朝鮮人の現在‐曖昧な‘同胞’の承認にむけて」『インパクション』185号 2012年6月

(12) 岡谷公二(2009)『原始の神社をもとめて』平凡社

(13) 鮮于煇・高柄翊・金達壽・森浩一・司馬遼太郎 座談会(1987)『日韓理解への道』中公文庫

(14)  “무쿠리코쿠리”라는 말은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했던 사실에서 연류되었다는 설이 대세지만 몽고의 침공과 해적의 노략질이라는 두 사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15) 진구코고는 츄아이(仲哀) 천황의 황후로, 신통력을 발휘하여 신라를 정벌했다는 전설 적인 존재입니다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있었습니다.

(16) 전근대적 네이션으로서의 의식(national awareness) 혹은 감정(national sentiment)과 근대적 내셔널리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만, E. J. Hobsbawm은 양자의 관계를 연속이 아니라 접속관계로 보면서, 전자를 proto-nationalism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Zimmer, O.(2003) Nationalism in Europe: 1890-1940 Palgrave Macmillan pp.33-42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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