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정 / 아시아세미나하우스 이사장]

하기에서 야마구치시까지는 자동차로 약 한 시간 정도인데, 그 사이에는 700 미터가 넘는 호오벤잔(鳳翩山)등 꽤 높은 첩첩산으로 둘러싸인 산길을 달려야 했다. 야마구치 현은 일본의 혼슈(本州) 최남단인데도 3월에 들어섰건만 산마루 그늘에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

야마구치시는 현청 소재지 치고는 한적함을 느낄 정도다. 이름만의 백화점 밖에 없고 그 흔한 영화관도 없다. 인구는 19만 명을 넘지만 시역이 넓고 분산된 상태라서 경제적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야마구치시는 현의 중앙에 위치하며 한반도 쪽으로는 역사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하기, 아름다운 어항 나가토(長門), 부관훼리로 부산과 연결되는 시모노세키(下関), 태평양 쪽으로는 옛부터 외항으로 쓰인 호오후(防府), 우베(宇部) 등 좋은 항구를 끼고 있다.

우베에는 공항이 있어서 최근 서울간 챠터 비행기가 오가고 있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유니크로”본사가 있어서 한국인들에게 가깝게 느껴질 것 같다.

또 야마구치는 신칸센(新幹線)과 추우고쿠(中国)・산요(山陽) 두 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있으며, 시내에는 유다(湯田) 온천, 야마구치에서 2-30분을 달리면 카르스트 대지인 아키요시다이(秋吉台)가 별세계처럼 펼쳐지고, 종유동굴인 아키요시도오(秋芳洞)와 같은 천연 관광 자원까지 갖추고 있어서 현의 수도로서 전혀 나무랄 데가 없는 곳이다.

무엇보다 야마구치시는 옛부터 이 지역의 중심지였다. 1360년부터 오오우치씨(大内氏)가 야마구치를 거점으로 세력을 떨쳤던 것이다.

오오우치 가의 내력이 재미있다. 야마구치시에 들어서니 마침 현청 앞의 역사자료관에서 오오우치 전시회가 열리고 있기에 들러보았다. 전시장에서 동냥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오우치 씨는 무로마치(室町) 시대(1392-1573) 지금의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다스린 영주이다. 이 오오우치 씨가 스스로 백제 성왕(聖王)의 세째 왕자 임성태자(琳聖太子)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611년 태자가 지금의 야마구치현 호오후시해변 타타라(多多良)라는 곳에 상륙했다가 야마구치의 오오우치로 옮겨 살게　되면서 오오우치 씨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 오오우치 히로요 동상 앞에서

임성태자가 일본에 정착한 이후의 동정에 대한 전시 자료는 없지만, 1182년 오오우치모리후사(大内盛房)가 스오(周防・야마구치의 동부)지방의 고급 관료로 등장한다.

이때부터 ‘오오우치’가 정식 가명으로 사용된다. 이후, 오오우치 씨는 출세를 거듭해 1351년에는 오오우치 히로요(大内弘世)가 스오 지방과 나가토(長門・야마구치의 서부)의 슈고(守護)에 임명되고 본격적으로 그 세력이 성장, 확대된다. 슈고는 원래 바쿠후(무로마치)가 임명하는 관직이었지만 점차 영주화(領主化)되어 갔다.

히로요가 교토(京都)의 중앙 무대에까지 진출하여 쿠게(公家・왕실 귀족)의 딸과 결혼한 것만으로도 그의 세력을 짐작할 수 있다. 히로요는 야마구치에 거관(居館)을 정하고 교토 풍의 도시로 꾸며갔다. 교토에서 시집온 부인을 위해 그리 했다고 한다. 지금도 야마구치에서는 서경(西京)이라는 명칭을 즐겨 사용한다.

오오우치 씨는 조선과의 관계를 중시해 1392년 조선에 무역선을 보내고, 자신들은 백제의 후손이니 토지를 하사해 달라고 탄원하기도 한다. 또 1453년에는 임성태자의 일본 입국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여 조선으로부터 답을 받았다 하는데, 그 내용을 전시자료에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오오우치 씨는 조선, 중국과의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해 가는데 이는 그들의 개방적 가풍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오오우치 가문의 세력이 절정에 이른 것은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1507-1551)시대로, 추우고쿠(中国), 큐슈(九州)의 북부 지방까지 그 지배하에 두었다. 1550년 자비엘(프란시스코 사비에르) 신부가 야마구치까지 온 것도 바로 이때였다. 지금도 야마구치 중심지에 ‘돌연히’ 자비엘 성당이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일본 최초의 미사가 행해졌고, 호롱불을 사용한 크리스마스트리도 처음으로 장식했다 한다. 이런 일들은 오오우치 가가 크리스트교를 보호하고, 이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과 포용력 그리고 시대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 총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사비에르 성당

이렇게 오오우치 가가 절정기에 달했을 때 멸망의 운명신이 찾아온다. 중신 스에하루카타(陶晴賢)의 반란으로 요시타카가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1551). 결국, 오오우치의 산하였던 모오리모토나리(毛利元就)에 의해 오오우치 가는 완전히 멸망(1557)하고, 야마구치를 포함한 추우고쿠 지방은 모오리 가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오오우치 씨가 백제 왕손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몇 가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성왕이 죽은 게 554년인데 그 아들이 611년에 일본에 와 후손을 둘 수 있었을까 하는 점, 당시 일본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나라 백제의 왕태자가 일본에 와 지방을 전전했을까 하는 점 등이다.

그러나 성왕 때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었고, 백제와 일본 사이에는 왕실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한다면 임성태자가 일본에 와서 활약했다는 사실이 전혀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무사나 영주가 대체로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오오우치 씨만 근거도 없이 일부러 바다 건너에서 자신의 출생 권위를 찾았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오오우치 가는 한반도와의 특별한 관계를 이어갔다.

‘해외’에 뿌리를 갖는 집안이었기에, 다른 농업적 영주들과 달리, 오오우치 가는 대륙과의 무역을 활발히 하고 “카미가타(上方・교토)”에 진출하는가 하면 이역의 종교까지 수용하고 보호하는 적극성과 개방성 혹은 합리성을 갖는 영주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후, 오오우치 가의 이런 가풍은 모오리 가에 계승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