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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山口)에서 보는 일본의 두 얼굴-(5)쵸오슈의 두 얼굴 그리고 일본의 두 얼굴
권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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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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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정 / 아시아세미나하우스 이사장

   
 

쵸오슈 한의 메이지 유신 운동은 쇼인이 제창하는 이념에 의거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쇼인이 제창하는 이념이란 ①존왕양이 ②일황만민 ③일등국가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다.

존왕양이란 천황을 받들어 외세를 배척한다는 의미이다. 다만 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가장 직접적인 배척의 대상으로 꼽힌 것은 열강보다도 미국, 영국 등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바쿠후였다는 사실이다. 존왕양이 속에는 바쿠후 배척・타도의 의미가 강하게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황만민이란 특별하고 초월적 존재인 천황 아래의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따라서 쇼오군(将軍・바쿠후의 최고 통치자)도 바쿠후도 존재 이유가 없다는, 역시 바쿠후 부정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만민평등이란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서의 시민평등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이 이념에서는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국민이 국가의 주권자라는 ‘국민국가’의 근대 정신을 찾아볼 수 없다.

운동의 이념이라기에는 너무나 세속적인 일등국가라는 의식은 아시아에서 열강과 겨룰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일본이야말로 아시아의 일등국가라는 오만이었다. 이는 아시아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주변 국가를 일본의 지배하에 두어야 한다는 자국중심주의의 발로였다. 이것이 배타적이고 침략주의적인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쵸오슈 한의 운동 이념에서는 개방・평등・민주・합리라는 근대 정신은 찾아볼 수 없고 폐쇄・배타・독선・과격으로 무장된 과도한 자국중심주의만이 돋보인다. 실제로 그들의 운동 과정에서 현실을 바로 볼 줄 모르는 비합리적인 과격한 행동이 노출되기도 했다.

쵸오슈한은 비합리적인 과격성 때문에 한때 고립되기도 했다. 황실조차도 열강과의 대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 황실(公)과 바쿠후(武)가 협력할 수 있는 하나의 체제(公武合体)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을 때, 쵸오슈 한만 존왕양이의 기치를 내걸고 바쿠후 타도를 획책했다.

결국 쵸오슈 한은 운동의 라이벌 사츠마 한 등에 의해 교토에서 축출 당하고 말았다. 이에 쵸오슈 한은 아이즈 한(会津藩)과 사츠마 한이 지키고 있는 고쇼(御所・궁궐)에 무리하게 들어가려다 무력 충돌을 일으키고 만다. 1864년에 일어난 하마구리고몬의 변(蛤御門の変) 혹은 킨몬의 변(禁門の変)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2차에 걸친 바쿠후에 의한 쵸오슈 정벌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정벌은 실패로 끝난다. 그리고 드디어 최후의 쇼오군 토쿠가와요시노부(徳川慶喜)가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납(大政奉還・1867년) 함으로서265년간 지속된 에도(江戸-현 도쿄)의 토쿠가와 바쿠후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쵸오슈 한이 이긴 것이다.

한때 외톨이가 되었던 과격한 “쵸오테키(朝敵・천황의 적, 국적)” 쵸오슈가 강대한 바쿠후를 상대로 어떻게 승자가 되었을까?

하마구리고몬의 변에 대한 문책으로 바쿠후는 쵸오슈 정벌을 단행한다(1차 정벌・1864). 이때, 영국・미국・프랑스・네덜란드의 연합함대가 시모노세키를 습격해와 쵸오슈로서는 바쿠후를 상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바쿠후에 순종할 뜻을 밝히고 하마구리고몬의 변의 주모자를 처형하고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1860년 야마구치로 옮겼던 한청(藩庁)을 하기로 되돌려 놓기도 헀다. 이에 한 내의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순종파를 제거하자 바쿠후는 다시 정벌군을 파견한다(2차 정벌・1867). 그러나 1차 정벌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이미 삿쵸오동맹이 맺어져 있었고 쵸오슈를 위협하는 외국 함대도 없었다.

그 보다도 쵸오슈의 군대 조직과 훈련 상황, 무기, 전술 및 지휘 능력에 바쿠후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바쿠후 군에는 사츠마 한과 같은 훈련된 군대는 물론 참가하지 않았고 지휘체계도 엉망인 구식 무기밖에 갖지 않은 오합지졸이었다.

그에 비해 쵸오슈 한은 비록 무사 출신이 아니지만 투지력으로 모여 조직된 기병대(奇兵隊)를 비롯해 잘 훈련된 군대와 신식 무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근대적인 군사학으로 병법을 도입하였던 사령관 오오무라마스지로(大村益次郎)가 있었고, 그의 전술과 지휘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것이었다. 그런 근대 군대체계를 정비시키게 된 그는 이후 일본 근대군대의 아버지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고, 도쿄 야스쿠니신사에는 그의 거대한 동상이 서있다. 오오무라마스지로는 본래 야마구치 출신의 동네 의사로, 네덜란드어로 의학을 공부하다 군사 관계 서적을 탐독하는 사이 서구의 과학기술에 눈을 뜬 전문지식을 갖춘 사령관이었다. 그는 뒤에 일어나는 보신전쟁(戊辰戦争) 에서도 활약하고, 일본 육군의 창설자로 기억되게 된다.

   
▲ 구 야마구치현 의회 앞에서.

바쿠후에 대한 충성과 전통적인 무사도(武士道)로 과학적인 무기와 효율적인 전술・지휘에 대적할 수는 없었다. 바쿠후군은 허무할 정도로 무기력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바쿠후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쵸오슈 한에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은 존왕의 충성심도 양이를 외치는 과격함도 토쿠가와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도 일등국가라는 오만도 아니었다. 과학과 전문 기술의 승리였던 것이다. 조화될 수 없는 두 얼굴을 갖는 쵸오슈 한은 이렇게 유신의 열매를 수중에 넣었다.

1868년 천황을 받들고 다죠오칸(太政官)이라는 박물관 창고에서 찾아온 듯한 이름의 내각이 설치되고 메이지 신정부가 출발한다. 이로서 도막 운동-유신은 성사되었다. 이후에도 유신정부군과 바쿠후 지지 세력간의 보신전쟁, 훗날 정부군과 사츠마군 사이의 세이난전쟁(西南戦争)와 같은 무력충돌로 발전하는 정권 안에서의 갈등이 이어졌다. 유신정부는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1872년 기존의 한 제도 즉 봉건체제를 폐지하고 오늘날과 같은 현 제도로의 개혁을 단행하여(廃藩置県) 중앙집권적 ‘근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은 근대적 혁명(revolution)은 아니었다. 가마쿠라 바쿠후 이래 70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무사 중심의 봉건체제로부터 왕정으로의 회귀・복고(restoration)였던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 운동은 처음부터 전진적 근대이념이나 사상으로 무장할 필요가 없었고 근대화의 청사진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주체적 시민의 성숙을 기다리고, 시민의 에너지를 탐할 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도 없었다. 민주적 내용 여하는 차치하고, 입헌체제가 갖추어지는 것은 유신 이후 20년이나 지난 1889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신정부는 군사・산업・교육・사회 등 넓은 분야에서 근대화 작업을 수행해갔고, 그 열매는 확실히 열리기 시작했다. 부국강병의 시정목표가 달성되어간 것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로 전략적 필요에 따라 일본 연구를 했던 베네딕트(R. Benedict『菊と刀』講談社)의 말을 빌리자면, “…유능한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근대화 작업”의 성과였다.

관료 주도의 근대화 작업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배경보다 현실적 효율이 더 중시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신정부는 미국, 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선진 문명을 보고 배워 와 일본의 근대화 작업에 공헌하도록 했다. 선진 문명의 바탕에 깔려있는 정신・사상 같은 것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보고 들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일본에서 재현할 수 있는 방안을 궁리하면 되었다. 제도는 미국의 것을 채택하고 운영은 독일 식으로 해 모순・알력이 표출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그런 모순・알력은 오늘날까지 해소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있다고 해도 크게 나무랄 사람 없을 것이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작업은 서구화・기술화라는 측면에서 틀림없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 그리고 그에 토대한 산업의 발전으로 세상은 한때 ‘일본 최고야!(Japan as number one!)’를 연발할 정도였다. 다만, 일본의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무라이(武士)문화’ 안에서 이루어진 유신보다는 “쵸오닌(町人)문화” 안에서 자란 장인 정신(根性)과 손에 의존하는 바가 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메이지 유신과 일본의 근대화를 한 선상에서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사무라이들은 전통 존중, 회귀(回帰), 복고의 폐쇄적 내셔널리즘에 토대해 일본 역사상의 하나의 커다란 변화를 이루어냈다. 그 변화를 계기로 이념 기피의 관리들은 유신의 이념과 무관한 서구의 과학기술과 효율성 우선주의를 추구하여 일본의 근대화-서구화・기술화를 이루어냈다. 논리와 성향을 달리하는 일본의 두 얼굴은 이렇게 만들어져왔다.

그리고 도막 운동으로서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쵸오슈의 정신적 에너지는 복수, 증오, 배타의 국수주의였다. 이러한 쵸오슈의 운동을 가능케 한 물리적 에너지는 오오우치 시대부터 계승해온 개발과 무역으로 얻은 부와 군사력이었다. 쵸오슈의 두 얼굴 역시 서로 다른 논리와 성향의 지속과 변화 속에서 만들어져왔다. 

일본의 두 얼굴과 쵸오슈의 두 얼굴이 겹쳐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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