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현 / 논설위원

역사적으로 제국의 폭주는 재앙이었다. 나폴레옹의 제국, 일본과 나치 독일이 추구했던 제국은 주변국과 피정복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겼다.

제국의 출현 뒤에는 전쟁, 학살, 노예, 억압, 착취, 차별이 있었다. 하지만 제국에 부정적 유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이 관용과 포용, 개방으로 나아갔을 때 평화와 질서, 문명의 발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로마제국이 천 년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공화정 시대에 뿌리내린 이민족에 대한 '관용'이 생명력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잔혹한 정복자로 인식돼 있지만 피정복민에게 인종적ㆍ종교적 차별이 없었다. 전성기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는 교회와 절, 모스크 등 온갖 종교의 사원이 평화롭게 공존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서의 출혈로 진이 빠진 대영제국으로부터 세계 최강의 지위를 물려받았다. 1989년 구소련 붕괴 이후에는 유일 초강대국으로 글로벌 질서를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지배와 폭력도 있었다. 국제 분쟁이나 무역에서 오만과 편견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신장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세계 각국이 미국의 그늘에 모여든 것은 엉클 샘의 관용에 기대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제국은 변방 약소국들의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들여 교육과 문화의 세례를 베풀었다. 미국은 후진국에 문명과 부, 기회의 상징이었다.

미국 신보수주의의 대부인 어빙 크리스톨은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미국은 제국이되 제국주의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단순한 강대국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책임의 거미 망에 갇혀' 세계에 대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한다. 미국이 제국적 권력이 된 것은 누가 결정해서 된 것도, 누가 오만한 야심을 가져서도 아니다. (…) 미 제국의 등장은 역사의 부름에 의한 것이었다." (이삼성 한림대 교수의 강연 '제국, 국가, 민족'에서 인용)

이런 견해에 좌파들은 흥분하고, 제국의 찬미자들은 일리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크리스톨의 나르시시즘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운명의 일부 또는 전부를 의탁해온 국가들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인식과 결별할 때가 온 것 같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선동자가 '나쁜 제국'의 망령을 불러내면서 미국 대통령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접근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는 과거 제국의 악덕이었던 인종주의와 차별의 언어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성의 가치를 팽개치고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그의 동맹국들에 대한 최근 발언은 충격적이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이나 일본, 나토 회원국 등 동맹국들이 미군 주둔 비용을 전액 부담하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더 노골적이다. 주한미군 분담금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김정은)가 있는 북한에 맞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협박했다.

상호 존중과 이해는 간 곳이 없고, 동맹국을 미국의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 냉전 이후 미국의 동맹국 지원이나 자유무역의 확대가 자비였던가. 결국은 미국이 이익 극대화를 위해 만든 제국의 질서가 아니었던가. 그 속에서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군림했고, 기축 통화인 달러와 다국적 기업을 내세워 번영을 구가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 질서를 통째로 부정하고 있다. 오늘 미국 사회에 빈부 격차 등의 문제가 심각하다면 그 건 소수의 탐욕을 통제하지 못한 자국의 실패이지 동맹국의 탓은 아닐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등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론조사를 보면 민주당 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 박빙이다. 밑바닥 여론은 트럼프에게 호의적이다.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퓨리서치센터가 성인남녀 2만8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57%가 미국은 자국 문제에 신경을 쓰고 다른 나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또 49%는 미국의 대외경제 개입이 자국 내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낮추고 있다고 봤다.

트럼프는 이런 여론을 업고 사회경제적 부조리를 외부 탓으로 돌리면서 지지자들에게 감정의 배출구가 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이런 민심의 흐름은 갈수록 급해질 가능성이 크다. 제2, 제3의 트럼프가 등장할 수 있는 무대가 탄탄하게 마련된 것이다.

에이미 추아(예일대 교수)는 저서 『제국의 미래(원제, DAY OF EMPIRE)』에서 제국이 흔들리면 인종, 종교, 문화, 경제적 불관용이 정치와 국민 정서를 지배한다고 짚었다. 로마와 페르시아 제국의 말기, 동양의 제국이었던 당(唐)과 오스만의 종말 직전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것이다.

미 제국의 말기 현상이 심화할지 아니면 자정기능을 발휘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이제부터라도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거나 무역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각자도생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넋 놓고 있다간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는 난감하다. 트럼프 당선에 대비해 한국은 다소곳이 미군 주둔비 추가 1조 원을 마련해야 하는가. 자유무역협정(FTA)은 어찌할 것인가. 핵을 갖든 말든 알아서 하라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우리가 국가의 생존을 언제까지나 남에게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홀로 판단하고 결단하고, 행동한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결국 믿을 곳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