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원 / 논설위원

일본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침략, 역사 왜곡, 독도 도발, 임진왜란…. 일본에 번지는 극우 풍토, 사사건건 부딪히는 한·일. 좋은 생각이 떠오를 틈은 좁다. 그렇다고 나쁜 이미지뿐일까.

1989년 묵었던 일본 나라(奈良)의 여관. 마지막 날 떠나는 손님을 향해 여주인은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큰절을 하며 말했다. “다시 오시라”고. 감동하지 않을 손님이 있겠는가. 무릎을 꿇어 절을 하자면 손님 대하는 정성은 오죽했을까. 고객만족, 일본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당시 퉁명스럽기만 했던 우리나라 상인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작은 가게 어디에서나 손님을 반갑게 맞고, 허리를 굽혀 왕으로 모셨다.

경제대국 일본. 1990년대만 해도 유럽연합(EU)을 포함한 경제력 순위에서 미국 다음이었다. 전쟁을 딛고 일어선 일본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신용이 아닐까. 믿음이 없으면 고객만족도 없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메이드 인 재팬’은 세계시장을 휩쓸었다. 코끼리 밥솥. 기술력도 좋았지만 믿음이 있었기에 일제 밥솥은 우리 주방을 초토화시켰다. 지금은 쿠쿠가 코끼리를 누른다.

일본인의 이런 특성은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은 ‘적중문견록(賊中聞見錄)’에 이렇게 적었다. “일본 본국 깊숙이 사는 왜인은 악착스럽지만 간사하지는 않다. 대마도 사람은 다르다. 간사스러운 꾀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마도 사람들이 들으면 “무슨 소리냐”며 버럭 화를 낼지 모르겠다. 하지만 후지와라 세이가(藤原惺窩)에게 조선의 유학을 전한 강항은 그런 글을 남겼다.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촉발시킨 원인도, 중종 때 삼포왜란도 대마도 왜구가 발단이었으니 나쁜 인식을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간사하지 않다”는 말. 믿음과 통한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이상국집(李相國集)’을 왜국에서 구해 와 다시 간행한 이야기를 하며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왜판(倭板)의 글자는 획이 가지런해 우리나라 것과 비교되지 않으니 그 풍속을 알 만하다.”

일본의 신용. 아직도 탄탄할까. 곳곳에 구멍이 보인다. 교묘한 말장난으로 ‘탈선한 정치’를 만드는 일본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스즈키의 파문. 26개 차종이 주행시험을 통한 연비 테스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열도가 온통 난리다. 스즈키뿐인가. 닛산의 캐시카이는 배기가스를 불법 조작한 혐의로 우리나라에서 판매정지당했다. 왜 이런 걸까. 세계 경쟁에서 밀리는 초조함 때문일까.

흔들리는 일본의 신용. 정작 돌아봐야 할 것은 우리 아닐까. “한국 상품이라면 믿을 만하다.” 그런 소리가 들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