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진 / 고령사회고용진흥원 수석전문위원

열흘쯤 전 일요일 아침, 이북 실향민들이 모여서 제(祭)를 지내고 통일을 기원하는 날, 주최 측에서 마련한 강화행 버스에 올랐다. 잠시 눈을 붙이고 얼마나 갔을까, 뒷좌석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왔다. 굳이 들으려 하진 않았지만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다. 둘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 사이로 보였다.

"서울에 사는 아주버님은 어떻게 지내세요?" "거기는 파주의 요양병원에 있지. 그런데 형수는 인정머리가 없었지. 잠시 피란 나와 형 집에 머무는데 방이 좁다고 내쫓더라고. 별 수 없이 집을 나와 한강변에서 천막을 치고 한 달간 지낸 적도 있어." 둘은 6·25전쟁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저는 6·25전쟁 때 겨우 네 살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구리까지 피란 갔다 오니 고향의 서른세 가구가 모두 불에 탔다고 들었어요." "정말 폭탄이 비 오듯 퍼붓고 폭탄 떨어진 움푹 파인 구덩이들이 지금도 생생해.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키면서 북한 350만명과 남한 250만명을 죽인 전쟁광이지. 전후엔 국립묘지, 지금의 서울현충원을 폭파하려고 한강에 잠수함까지 동원했었잖아. 우리는 그걸 막겠다고 수중보를 설치하고 난리를 쳤지. 하기야 미얀마까지 가서 아웅산 테러를 저지른 북한인데…."

이런 말도 나왔다. "문제는 이런 북한 실상을 요즘 젊은이들이 너무도 모르고 외면하는 것 같아. 전쟁 중에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 빨갱이들은 구장·면장·군인·경찰과 그 가족까지 무조건 철사 줄로 묶어 생매장하거나 총살했어. 그게 그들이 말하는 민족해방이라니…. 게다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북으로 끌려갔나. 그렇게 월북당한 가족들의 한과 슬픔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우리가 죄인인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대화는 끝이 없었다.

이북 고향에 두고 온 이산가족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산가족 신청한 건 어떻게 됐어요?" "웬걸, 깜깜 무소식이지. 죽으면 연락도 안 온다고 하던데 이렇게 살아 있는데도…." "제 남편은 이젠 관심도 없어요. 만날 가능성이 없다면서요. 생전에 어머니는 이산가족이 만나면 여기 자식들까지 해코지당할까 걱정하셨어요." "그렇지만 핏줄인데 한번 보는 게 소원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상봉을 기다리다 죽은 사람들이 이제 반(半)이 넘으니 그것도 희망이 없어. 그리고 나도 나이가 들어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별말씀을요, 아직도 정정하신데요."

이들은 90대와 70대의 미수복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실향민이었다. 본의 아니게 들은 그들의 향수, 그리고 애타는 그리움을 나 역시 잘 안다. 나 또한 60대의 실향민 2세다. 아버지는 북에 두고 온 형제와 부모를 지금도 걱정한다. 말 그대로 자나 깨나 통일을 고대한다. 모내기를 끝낸 넓은 논이 보이더니 버스가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에 도착했다. 이북 고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광덕 면민 회원들은 해마다 한번 이곳에서 고향을 그리고 조상을 기린다.

분단과 전쟁으로 헤어진 1000만 이산가족의 기다림의 세월이 무려 70년이 넘었다. 재회는 정말 한시가 급하다. 상봉 신청자가 워낙 고령이어서 앞으로 10년 정도면 대부분 눈을 감을 것이라고 한다. 이산가족 만남은 당장 풀어야 할 과제인데도 현실은 여전히 요원하니 서글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