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운찬 / 경향 후마니타스연구소장

지난달,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관하는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의 일환으로 경기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을 찾았다. 마당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흉상이 놓여 있었다. 김학순, 강덕경, 김순덕, 김옥주, 문명금…. 고인이 된 할머니들이다. 남아 있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는 90세. 이제 그들의 삶은 역사다. 역사관으로 들어가니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 동원되었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실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위안부 강제 동원 실태, 위안소 분포 지도, 위안부 여성의 사진, 피해자 육성 증언, 실물로 재현한 위안소 내부 등을 보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통과의례일 뿐이다. 더 불편한 점은 역사관에 전시된 사진, 도면, 서적 등 자료의 대부분이 ‘일본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발굴하고 연구한 자료나 전시물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간 이가 일본군이었다면, 오늘날 위안부의 실상을 알려준 이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다.

1991년 8월, 위안부 문제는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파장이 컸지만, 한국의 학계는 수수방관했다. 일본 내의 움직임은 달랐다. 이듬해 일본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는 일본군의 위안부 개입을 확인시켜주는 자료를 공개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요시미는 “김학순 할머니의 TV 인터뷰가 마음에 크게 와닿아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그는 연구를 계속하며 <일본군 군대위안부> <종군위안부자료집> 등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내놓았다. 요시미를 비롯해 일본 내 위안부 연구는 꽤 축적된 상태다. 국내에 출간된 위안부 서적은 일본인 저서를 번역한 게 대부분이다.

한국 학계, 특히 역사학계의 위안부 연구는 사실상 전무하다. 한 역사학자는 “일본이 위안부 관련 사료를 공개하지 않아 연구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요시미처럼 위안부 문제를 파고들었다는 역사학자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민족문제연구소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같은 시민단체나 여성학자, 법학자 등 일부 연구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주목하고 연구한 사례는 더러 있다. 그러나 아직 단행본 수준의 성과는 없다. 다만 정대협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전5권)을 펴낸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또 수요시위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킨 공로도 인정받아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주목받는 것은 정대협을 위시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투쟁 결과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파문을 일으킨 것도 학계의 빈약한 위안부 연구의 한 증거라 할 수 있다. 내가 읽은 이 책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혔다기보다는 위안부 문제를 재해석한 비평서에 가깝다. 그것도 일본 소설, 영화, 증언집 등에 나타난 위안부 피해자의 사례를 탈민족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정도다. 학계의 연구가 축적됐다면 논쟁거리도 되지 못했을 책이다.

엊그제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이 출범했다. 다음달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화해와 치유의 재단’(가칭)이 발족된다. 각각에 시민 성금 10억원, 일본 정부 출연금 10억엔이 투입된다고 한다. 두 개의 재단이 설립되면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민관의 갈등이 심화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위안부 재단이나 기념관을 설립하는 데 있지 않다.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일본에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며,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가 졸속으로 이루어진 것은 국내 연구가 부실했던 탓도 크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위안부 연구는 초보 단계다. 용어조차 정립하지 못한 채 ‘일본군 성노예’와 ‘일본군 위안부’로 달리 쓰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연구를 개별 학자의 학문적 열정에만 기댈 수 없다. 연구진과 예산을 갖춘 기관이 나서 공동연구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임무를 독립기념관이 떠맡았으면 한다. 1987년 출범한 기념관은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와 전시·홍보 역량을 축적해 왔다. 이제는 독립운동·투쟁의 연구에서 벗어나 침략사에서도 평화와 인권, 화합과 연대의 가치를 발굴해야 한다.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중국, 필리핀, 대만, 그리고 일본에까지 걸쳐 있다. 동아시아의 공동연구와 연대는 그래서 필요하다. 내년 30돌을 맞는 독립기념관이 위안부 연구와 연대활동을 통해 아시아 평화·인권의 센터로 탈바꿈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