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재 / 경인교대 교수

새로운 곳을 방문하고 체험하는 것이 직업인 지리학자로서 낯선 나라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얻는 좋은 방법이 있다. 그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그 나라의 대표적 신문을 사서 훑어보는 것이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몰라도 신문의 사진이나 광고의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도 대충 그 사회의 상황과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나에게는 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의 신문이 인상적이었다.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활짝 웃는 은발의 노인들, 코에 피어싱을 한 청소년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북유럽 신문에서는 등장인물의 비중이 남녀노소 균형 잡혀 있었다. 국제면 기사도 미국·중국·독일 등 강대국뿐 아니라 아프리카나 중남미 등 개도국의 입장도 충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이보다 조금 더 풍부한 지리적 상상력을 갖게 된 비결은 그동안 꾸준히 읽어온 영국 신문의 공이 크다. 런던에서 불안한 비정규직 연구원으로 고단하게 생활하던 시절 유일한 사치는 타임·가디언·인디펜던트 등 국제·문화면이 풍성하고 사진과 편집이 아름다운 영국 신문을 골라 읽는 시간이었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당황시킨 브렉시트의 발생 원인을 캐머런 총리 개인의 판단 착오, 영국 정당정치 실패, 기존 엘리트층에 실망한 저소득층의 분노로 돌리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원래 정치인들은 쇼맨십에 능하고 단순한 구호나 이미지로 승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콘텐츠 없이 허풍만 떠는 정치인을 키우고 죽이는 것은 결국 언론의 힘이다. 거짓 정보에 근거해 브렉시트 여론몰이를 주도한 전직 신문기자이자 런던시장이던 보리스 존슨을 띄운 일등공신은 선, 데일리미러 등 ‘찌라시 신문’이었다. 유럽연합(EU) 탈퇴에 투표하면 영국은 유럽의 족쇄에서 벗어나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데, 막상 신문을 펼쳐보면 포르노 사진과 인종차별적 기사, 스포츠·연예면 가십거리만 가득하고 브렉시트 이후 전개될 상황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이나 정책적 제안은 찾아볼 수가 없다.

200만부를 훌쩍 넘는 발행부수를 자랑하며 영국의 민심을 좌우한다는 얄팍한 두께의 저가지, 선의 소유자는 호주 출신 루퍼트 머독이다. 영국의 자존심 타임까지 인수한 미디어 재벌에게 신문은 그저 돈벌이 수단일 뿐, 영국 사회를 걱정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책임감까지 바라는 건 무리다. 결국 브렉시트 위기는 무능한 정치인을 내세워 인종·지역 갈등을 부추긴 저질 언론이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고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기보다는 판매부수 늘리고 수익률 높이는 데만 혈안이 된 황색 저널리즘의 업보인 것이다.

하지만 극심한 혼돈과 위기 상황을 극복할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 역시 언론의 몫이다. 지난 2주간 지속된 무정부 상태에서 싸구려 신문뿐 아니라 타임조차도 보수당 내부의 총리 경선구도를 스포츠 중계하듯 흥미 위주로 보도할 때 브렉시트의 원인과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려 애쓴 저널리스트들의 열정과 투혼은 단연 돋보였다. EU 탈퇴를 선동하던 정치인들이 막상 브렉시트가 발생하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무책임하게 사라지는 가운데 양심적인 기자들이 중심이 된 독립 언론만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논리를 전개하고 치열하게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특히 저널리즘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가디언은 브렉시트 직후 신문 판매량만 7만부 이상 급상승했고 인터넷판 조회수도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많은 사람들이 본다고 해서 저절로 좋은 신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판 브렉시트’를 예방하려면 진실을 알리고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강한 신문, 내 욕심만 챙기기보다는 함께 잘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언론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진다. 인권과 정의보다 자본의 논리를 우선시하는 신문, 흥미 위주의 시청률 경쟁에 매몰된 종편에 나라의 운명을 맡기는 것은 너무 위험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