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 / 기자

재미동포가 미국 시민권을 따면 '아메리칸 드림'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만 재일동포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 '배신자' 취급을 받는다. 왜 우리는 중국의 동포(조선족)나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의 동포(고려인)가 거주국 국적을 지닌 것은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유독 재일동포는 모국의 국적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할까.

한국 국적자라고 해서 한 핏줄로 대접받기가 쉬운 건 아니다. 우리말이 서툴다는 이유로, 아니 우리말이 능숙하다 해도 단지 일본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쪽발이'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1970∼1980년대 일본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자주 들은 주의사항이 "우리말이 유창한 재일동포는 북한과 가까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소속일 가능성이 크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재일동포의 곤혹스러움을 짐작할 만하다.

재일동포에게 이러한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까닭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해 가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한 가해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살거나 일본인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혹시 친일파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한때 재일동포들을 가리켜 '돈포'라고 비아냥거린 것도 "더러운 일본인에게 빌붙어 돈을 벌었다"는 뜻의 비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이러한 냉대와 질시는 재일동포에게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재일동포 1세들은 대부분 징용으로 끌려갔고, 나머지 상당수도 일제의 착취와 수탈을 견디다 못해 살길을 찾아 건너간 이주노동자였다. 식민통치의 본국이어서 감시와 통제가 삼엄한 탓에 중국·러시아·미국만큼 활발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도 2·8 독립선언과 박열의 의거 등 항일운동의 불길은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아 눌러앉은 재일동포들은 친정을 도우려는 며느리의 심정으로 조국애와 동포애를 발휘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때는 한국 대표팀의 출전 비용을 지원했다. 그때는 일본에도 굶는 사람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6·25가 발발하자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했고 이중 135명이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이는 중동전쟁에 참전한 외국 거주 이스라엘인보다 17년이나 앞선 전 세계 최초의 재외동포 참전 기록이다.

재일동포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에도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수출 한국의 요람이 된 서울 구로공단은 재일동포들이 입안해 1967년 준공했다. 입주사의 70%가 재일동포 기업일 만큼 투자와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늘날 리딩뱅크로 우뚝 선 신한은행도 1982년 재일동포들이 돈을 모아 설립했다. "국부를 유출한다"고 호들갑 떠는 일본인들의 방해와 "한국에 투자하면 돈을 떼인다"고 걱정하는 지인들의 만류를 무릅쓴 결정이었다. 재일동포들은 고려 말 중국에서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와 심었다는 문익점의 심정으로 1960년대 제주도에 감귤 묘목 400만 그루를 보급하는가 하면, 1970년대 모국의 농촌 152개 마을과 자매결연해 새마을운동을 돕기도 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재일동포들이 모은 성금 541억 원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였다. 일본을 뺀 나머지 해외 지역에서 답지한 성금 6억 원의 90배였다. 올림픽공원의 체조·수영·테니스경기장과 미사리 조정경기장, 올림픽회관, 전국 명승지의 수세식 화장실 등이 이 돈으로 세워졌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도 본국 송금운동을 벌여 4만8천 명이 10억 달러를 보냈다. 국내에서 금 모으기 운동으로 거둔 19억9천만 달러의 절반을 넘는 액수다.

재일동포들은 일본 현지에서도 한국 상품 수출의 첨병이자 한류 확산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 대일무역 역조를 타개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모국상품 구매단을 결성해 한국 상품을 대대적으로 사들였고, 1990년대에는 '바이 코리안'(Buy Korean)이란 슬로건을 앞세워 '국산품 애용운동'을 펼쳤다. 일본에서 한국산 의류, 라면, 김치가 '3대 히트 상품'으로 떠오른 것은 재일동포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TV드라마, 영화, K팝 등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면에도 재일동포의 노력이 숨어 있다.

재일동포들은 도쿄의 주일한국대사관 청사를 비롯한 10개 한국 공관 가운데 9곳의 대지와 건물을 기증했다. 해외 거주국 동포들이 공관을 본국 정부에 기증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일하다. 그러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활약상이 교과서에 실린 것과 달리 이 같은 재일동포들의 눈물겨운 헌신을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지난 4월 15일 일본 도쿄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헤이트 스피치' 근절 법안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제공]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동포사회의 주류가 2세에서 3세로 옮겨가고 1980년대 이후 건너간 '뉴 커머'(new comer)의 비중이 늘어나 예전과 같은 헌신과 열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해도 이들 역시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곳곳에서 조국을 돕고 있다.

그런 재일동포들이 최근 들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에 따라 혐한(嫌韓) 시위나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혐오 표현)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코리아타운에 찬바람이 불자 이곳에 종사하는 많은 동포가 극심한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재일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모국 돕기 운동을 주도해온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 10월 3일 창립 70주년을 맞는다. 이를 계기로 지금까지 모국에 기여해온 재일동포들의 참뜻을 되새겨보고 이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냉대에 함께 가슴 아파하며 부드러운 시선과 따스한 손길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이들에게 적용해온 이중잣대는 거둔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