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현 / 언론인

당연히 한국정치, 한국 국회를 두고 하는 말로 알았다. '국민은 없고 설전만 가득했다.' 9월27일자 중앙일보 미주판 1면 제목이었다. 그러나 웬걸 기사의 사진에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전날 있었던 첫 번째 미국 대선 TV토론회 기사였는데 그 기사의 제목이 한국 정치에서 너무나 많이 들어 본 바로 그 말이었다.

한인들 마음속에 미국 정치는 한국보다 썩 우위에 있다는 선입감이 있다. 그러나 요즘 보면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미국의 정치가 한국을 닮아가겠다는 것인가. 정책보다는 비방과 막말과 억지가 판을 치고 있었다. 그러니 '국민은 없고 설전만 가득했다'는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지금까지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는 꿈이 있었고 비전이 보였었다. 3억2000만 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이긴 하지만 '어떻게 저런 보석 같은 사람이…' 할 정도로 광채가 나는 지도자가 나타나곤 했었다. 그런데 공화당이나 민주당에 이제 인물이 고갈되었다는 것인지, 도저히 정치인이 될 수 없는 그저 그런 사람과 너무 정치인스러워 오히려 탐욕스럽기까지 한 두 사람이 벌이는 진흙탕 싸움을 보면서 선거를 한 달여 남겨 놓고 있는 미국의 모든 유권자들의 마음속에는 피곤과 시름이 깊어진다.

대통령 선거가 아직은 1년3개월이나 남은 한국에도 어느새 선거열풍이 불어 닥쳤다. 그 막중한 직책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로 매진해야 하는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흘린 조기 귀국설이 열풍에 불을 당긴 계기가 되었다. 요즘 들어 부쩍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하고 손 쳐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야권과 달리 여권은 현재의 권력에 눈치 보느라 함부로 손을 들 수도 없어 때로는 싸움판의 선봉으로, 때로는 설전의 첨병으로 존재감을 보이기도 한다.

국회가 파행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현상 때문이다. 자질 없는 사람을 장관시키겠다고 국회에 알려 왔는데 그 사람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국회가 의결했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이를 무시하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심기에 호흡을 맞춘다며 국회를 거부하는 여당에게나 국민이 있을 리가 없다. 여당 대표는 국회의장 물러가라며 단식을 하고 있고 협상의 자리에 나와야 할 여당 원내대표는 연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국회의장에게 비난만 퍼붓고 있는, 그래서 책임은 없고 오기만 넘치는 이상한 나라의 풍경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맞는 말을 했다. 북핵이며, 지진이며, 경제위기며, 지금은 한국이 매우 위중한 비상시국이라고. 정말 그렇다. 그러면 대통령부터 거기에 대처하는 비상한 발상과 비상한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국민들에게 미르재단인지, K 스포츠인지 하는 수상한 두 재단에 관해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고 그 일로 마음고생이 심한 두 수석비서관을 이제는 풀어 줘야한다.

그런 다음 지난번에 아무 소득 없이 끝난 각 정당대표들과의 회동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국민의 목소리로 경청해서 어떻게 남은 임기를 잘 정리하며, 어떻게 국가의 위급한 시기를 잘 관리할 수 있는지에 관해 뜻을 모아 보기 바란다. 협상과 대화는 늘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 주도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당은 고작 국회의장을 그만 두게 한다는 협량의 비상대책위원회가 아니라 국가를 살리기 위한 통 큰 '여야 국가비상대책위원회'의 구성을 야당에 제안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국민이 보일 것이고 국민도 자연히 마음을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