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수 / 자유기고가·뉴저지

얼마 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인 비정상들 간의 정상 이야기를 흥미롭게 시청한 적이 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어는 배우고 익히기에 만만치 않을 텐데 쓰는 말이 너무 자연스럽고 능통해서 놀란다. 전문가들에 버금가는 논리와 어휘 선택 하며 토속 지방민이 아니고는 느낄 수 없는 감성적인 표현들조차 자유자재로 잘도 구사한다.

이날의 토론 주제는 과거 식민 지배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들 간의 공방이었다. 껄끄럽고 불편한 주제였지만 뼈 있는 말로 공격하고 진솔하게 사과하거나 위트로 잘도 피해 가면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아 갔다. 참석자의 면면도 다양해 동서양 문화, 황·백·흑의 각자 다른 피부 톤, 비록 홍일점이었지만 남녀 간의 성비조차 갖추고 있어 공정성까지 확보했다.

피해국 대표로는 한국·중국·인도·가나·리비아 등이라면 가해국으로는 일본·영국·독일·이탈리아였고 미국과 스위스 등의 대표 청년들이 중립의 위치에 섰다.
이들 중 가장 주목을 끈 대표자가 일본과 독일 청년이었다. 두 나라 모두 2차대전 가해국이자 패전 당사국으로 전후 어떤 인식 변화 속에 지구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느냐를 가늠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서다. 그러나 두 대표는 너무 달랐다. 역사 과목이 필수가 아니라 근현대사를 배워 볼 기회가 없었다는 명문 게이오대학 출신인 일본 청년은 일본 군부가 저지른 인면수심(人面獸心)의 731부대 생체실험 만행이나 지금도 백골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난징(南京) 인민 대학살 같은 역사적 사실을 한국에 와서야 알았노라고 실토하였다. 자유세계의 ‘일반 상식’이 일본 청년에게는 ‘비밀 지식’이 되는 셈이다. 일본의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자국민을 우민화(愚民化)시킨 결과다.

그러나 독일은 달랐다. 일본과 달리 독일은 역사 과목을 필수로 지정하고 과거 나치가 국제사회에 저지른 범죄들을 소상하게 가르치고 반성하게 한다고 털어놓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조합이 이탈리아와 리비아였다. 가해국 청년과 피해국 여성으로 만난 이들은 유일하게 중간투표에서 양국 간에 용서와 화해, 보상이 이뤄졌다고 보느냐에 ‘그렇다’고 답했다.

역사적으로 리비아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인 1911년부터 1943년 독립 때까지 32년간 이탈리아의 식민국으로 나라 없이 살며 저항했다. 그 뒤 1969년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가다피는 그의 본색대로 리비아 내 모든 이탈리아인들을 강제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양국 관계는 지난 40여 년간 견원지간(犬猿之間)으로 지냈다. 그러다 2008년 8월 31일,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리비아의 항구도시 벵가지에서 가다피와 회담을 통해 극적으로 화해하면서 두 나라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동반하기로 합의하였다. 회담 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여 리비아 독립영웅 오마르 모크타르 아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하였고 물질적·정신적 보상 50억 유로를 향후 25년간 리비아에 제공할 것을 선포하였다.

독일 또한 이에 못지않다. 1970년 12월 7일 취임 후 처음으로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찾은 빌리 브란트 수상의 사죄 행보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유대인 게토의 희생자 기념비를 찾아 헌화한 후 때마침 내린 비로 축축히 젖은 맨바닥에 돌연 무릎을 꿇고 과거 나치가 저지런 만행들에 대해 참회하면서 자유세계는 전율하였고 묵시적으로 독일은 용서 받았다.

그에 비하면 일본은 안타깝다. 애써 마련한 대화 분위기를 ‘통석의 염(痛惜の念)’ 같은 사전에도 없는 말장난으로 피해국 국민들을 염장 질렀고 잊을 만하면 망언을 통해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국제사회의 선한 압력에 굴복하여 10억 엔인가를 위안부 할머니들의 입막음으로 내놓고는 세상을 다 준 양 유세 떨면서 대사관 앞 소녀상을 치우라고 무례한 요구들을 계속하고 있다.

화해와 용서의 전제는 사과다. 그리고 그 사과에는 진정성과 정신적·물질적 보상이 포함되어야 함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성경에도 신께 예물을 바치기 전 먼저 가서 형제 간에 켕기는 것을 풀고 다시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강권하고 있을 정도다.

요즘 일본은 극우의 본색과 군국주의 타성을 점점 노골화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을 빌미로 핵무장을 은근슬쩍 간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역사를 왜곡하고 침략을 미화하면서 주변국들과 척을 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알아야 한다. 과거는 숨기고 덧칠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형태로 올무가 되어 그들 청년들을 국제사회에서 겉돌게 만들고 왕따 당하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