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현덕 / 논설실장

한 달 후, 어쩌면 우리는 현대사의 한 장면을 장식할 사진 한 장을 보게 될지 모른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함께 온천욕하는 사진. 아베와 푸틴은 지난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14번째 만남을 가졌고 이번 주말부터 페루에서 개최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다시 회동할 예정이다. 그리고 12월 15일 역사적이고도 남다른 의미가 있는 정상회담을 한다.

정상회담 앞에 `역사적`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자명하다. 110년 전 일본과 러시아는 전쟁을 치렀다. 1905년 일본은 세계 최강의 발틱 함대를 무찔렀다. 40년이 지나 소련이 복수한다. 1945년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미국과의 은밀한 뒷거래를 배경으로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깨고 대일전에 참전한다. 그래서 얻어낸 것이 지금 러·일 간 영토 분쟁이 된 쿠릴열도 4개 섬이다. 다음달 러·일 정상회담에서 쿠릴열도의 일부 반환이 이뤄질 것 같은 분위기다. 이렇게 되면 과거 제국주의와 냉전시대에 두 나라를 옭아맸던 족쇄를 푸는 단초가 마련된다. 그래서 역사적이다. 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홋카이도까지 연결하는 대역사나 43조원 규모 북극해 가스전 개발 프로젝트를 뛰어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정상회담 앞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는 수식어를 쓴 이유 역시 자명하다. 밀월이 이뤄지는 장소가 야마구치현이기 때문이다. 야마구치가 어떤 곳인가.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고 왕정정치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조슈번의 본거지. 조슈가 낳은 대표적 사상가인 요시다 쇼인이 이토 히로부미 같은 침략주의자들을 양성했던 곳.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를 밀랍 인형으로 만들어 기념하는 곳. 야마구치는 아베의 정치적 고향이다. 아베와 푸틴은 아마도 야마구치에 있는 료칸(旅館)을 잡아 일본식 식사를 하고 야외 온천욕을 즐길지 모른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 상상이다. 그러나 이런 유의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파격적`이란 수식어를 하나 더 추가시킬 게 분명하다.

아베는 취임 직후 "지구본을 위에서 내려다보는(俯瞰·부감) 외교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세계를 아우르는 외교, 즉 대국적 차원에서 국제관계를 보겠다는 야심이었다. 동남아를 훑고, 아프리카를 개척하며, 중동과 남미까지 종횡무진이었다. 취임 이듬해인 2013년 49개국을 방문했다. 당연히 방문했어야 할 것 같은데 빠진 곳이 있다. 바로 중국이다(물론 한국도 포함된다). 다분히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행보였다. 이때부터 일본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야마구치에서의 러·일 정상회담은 이런 점에서 `중국 봉쇄`란 아베의 발톱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로써 아베는 외교적 숙제를 거의 다 해결하게 된다. 중국과는 어차피 불가피한 갈등을 관리한다는 쪽으로 정리했고 한국과는 작년 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위안부 합의로 넘어갔다고 판단한다.

우리는 아베가 이렇게 장기 집권할지 예상하지 못했다. 국제무대에서의 광폭 행보도 얕잡아 봤다. 과거사를 내세워 감정적 대응으로 일관한 결과 동맹 관리에서의 편차는 크게 벌어졌다. 단언컨대 박근혜 외교의 최대 참사다. 아베가 서둘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만나는 걸 두고 우리는 `호들갑`으로 폄하한다. 미·일 관계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서로 퍼스트네임을 부르는 `론-야스 관계`처럼 격상될지도 모르는 판인데 말이다. 국가안보를 감안한다면 당연히 추진해야 할 한일 간 군사정보 교류마저도 삐걱댄다. 자업자득이다.

모름지기 외교를 내치에 이용하려고 할 경우 국가는 재앙을 맞는 법. 더욱이 트럼프의 등장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4대 강국이 숨 가쁘게 고공 플레이를 펼치게 되는 시발점이 될 게 분명하다. 동북아에 120년 전 제국주의 열강의 다툼과도 비슷한 격랑이 휘몰아치는데 대한민국 외교는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