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호 /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를 보면 혼돈의 시절은 더 길어질 것 같다. 대통령 스스로 임기를 마치지 않고 퇴진하겠다는 의사는 밝히고 국회에서 합의해 정해 달라고 했다. 야당에서는 이를 꼼수로 받아치고 탄핵을 추진하고 있어 소모전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논란이 길어질수록 국정마비는 가속될 것이다. 최근 한 달 열흘여 동안 대통령이 주재한 국정회의는 한 번도 열리지 못했다. 수석비서관회의조차 없다. 각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진 모두 손을 놓고 있다. 그런 사이에 나라가 얼마나 절단 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된다.

우리가 혼돈 속에 헤매고 있는 사이 나라 밖 세상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예상 밖 당선은 본인 말대로 브렉시트를 열 배 이상 능가하는 메가톤급 폭탄이 됐다.

언론도 그랬지만 우리 외교당국은 트럼프 당선 가능성을 거의 열어놓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허둥댈 수밖에 없다. 정부 사절단으로 급히 날아간 조태용 국가안보실 1차장 행보는 오히려 대내용이다. 트럼프 측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내정된 마이클 플린과 만나 사진 한 방 찍고 왔다. 한미동맹은 미국의 핵심 동맹이며 북핵 문제에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게 방미 성과다.

트럼프와 면담을 위해 아베 신조 일본 총리처럼 뉴욕으로 우리 대통령이 달려갈 수 없는 처지인 걸 다 안다. 그렇다면 이럴 때 외교부 장관이 왜 존재하는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윤병세 장관은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최장수 외교장관 기록을 이미 달성했다. 계속 가면 박정희정부 때 박동진 장관의 4년8개월, 이승만정부 때 변영태 장관의 4년3개월 기록도 갈아치울 수 있다. 대통령과 5년간 임기를 같이할 수 있을 거라며 오병세라는 별명까지 붙었지 않나.

세계 외교가에서는 장수 외교장관으로 두 전설을 꼽는다. 1974년부터 외무장관을 시작해 독일 통일을 이끌어낸 뒤 통독 초대 외무장관까지 18년간 재임한 한스-디트리히 겐셔에겐 그가 없었다면 통일 독일 출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닌다. 냉전 시절 구소련에서 1957~1985년 외무장관을 역임한 안드레이 그로미코는 흐루쇼프, 브레즈네프를 거쳐 고르바초프 등극 때까지 조연이지만 서방과의 줄다리기를 사실상 이끈 주역이었다.

윤 장관은 지난주 호주에서 열린 중견 5개국 협의체 믹타(MIKTA) 외교장관회의에 모습을 보였지만 페루 리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박 대통령 대신 참석한 황교안 국무총리와 비슷하게 비쳤을 뿐이다. 존재감 없는 한국 외교의 투영이다.

우리가 트럼프 시대에 마주칠 현안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이니 가볍게 넘길 수 없다. 갑작스러운 미-북 직접 대화도 닥칠 수 있다. 그런데 지난 14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꺼낸 윤 장관의 언급은 한가했다. 미국 정부 내 일련의 정책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어질 것이니 트럼프의 공약 실현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트럼프 인맥찾기식의 일차원적 외교를 바라는 게 아니다. 기업가 출신으로 실리와 실용주의를 내세울 것이라면 그에 맞는 논리와 대응방안을 짜내는 게 핵심이다. 좌충우돌이라 해도 트럼프는 지난 9월 7일 필라델피아에서 주목할 만한 외교정책을 꺼낸 바 있다.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였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공약을 인용한 표현이지만 여러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해군력 강화를 약속했다. 급속하게 해군력을 키우는 중국 대응으로 연결되니 버락 오바마의 아시아 중시 정책에 유사한 방향을 읽게 한다.

오병세라는 별명에 부응하려면 윤병세가 있으니 외교는 문제없다는 믿음을 주도록 팔 걷어붙이고 나서 보라. 보스가 몇 번 바뀌어도 십수 년 정책을 이끈 겐셔나 그로미코의 역할까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대통령 유고 시기에 외교부라도 흔들림 없이 제 일을 하고 있음을 국민에게 보여주라는 소박한 주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