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ㅣ논설위원

본능을 억제하고 적에게도 손을 내미는 것이 문명사회로 가는 길이다. 중세 암흑기 때의 일이다.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는 성지인 예루살렘 순례를 막는다는 이유로 이슬람세계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른바 200년에 걸친 십자군전쟁의 시작이다. 기독교 군대는 11세기 말 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다. 이어진 것은 유대교인과 이슬람교도에 대한 살육이었다. “예루살렘의 큰 거리나 광장에는 사람의 머리나 팔, 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이보다 섬뜩한 것은 피로 칠갑을 한 병사들의 광기어린 눈이었다.”

88년이 지난 뒤 3차 십자군전쟁이 일어났다. 영국이 ‘사자 왕’ 리처드 1세의 지휘하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왔고, 이슬람은 살라딘이 이에 맞섰다. 이라크 출신의 살라딘은 아이유브왕조를 창건한 인물이다. 전쟁 중 살라딘은 아량을 잊지 않았다. 그는 리처드 1세가 전투 중에 낙마했을 때 새 말을 보냈고, 리처드가 고열에 시달렸을 때는 산에 쌓인 눈을 보냈다고 한다. 참전국 간 내분으로 예루살렘 탈환을 포기한 리처드 1세는 귀국길에 올랐고 성지는 살라딘의 수중에 들어왔다. 살라딘은 ‘이에는 이’로 보복하지 않았다. 살라딘은 이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도 허용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그를 플라톤, 소크라테스과 함께 고결한 이교도로 칭송했다. 역사는 개방과 관용을 향해 진보했다.

100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미국은 문명에서 야만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불법이민을 막겠다며 멕시코 국경에 수천㎞에 이르는 현대판 ‘만리장성’ 축조에 들어갔다. 이민족, 이교도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7개국 시민들을 ‘종교와 민족’을 문제 삼아 입국심사대에 세웠다. 기후변화협약도 무효화하고, 강한 군대를 만들겠다며 주변국들을 자극하고 있다. 이교도와 이민족 차별이 미국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지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위대한 국가의 재건’을 공언했다.

위대한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경제적 풍요와 강성한 군사력으로 강대국이 될 수는 있다. 로마, 페르시아, 중국의 당나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미국에 이르기까지 강대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기반이 됐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획득한 노예로, 스페인은 은광 발견으로,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한 생산성 증대라는 모멘텀으로 경제력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국방력을 키운 뒤 다시 무력을 지렛대로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부국강병만으로는 부족하다. ‘동시대에 모범이 되는 가치를 가지고, 주변 국가로부터 존경받는 국가’를 위대한 국가로 정의한다면 힘만 있다고 위대한 국가가 되지 못한다. 춘추전국시대 서쪽 변방국에 불과하던 진나라는 부국강병에 성공해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을 통한 부국강병으로 국력을 키워 제국주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중국 통일 후 가혹한 정치체제로 인해 15년 만에 멸망했고, 일본도 메이지유신을 기화로 부국강병에 성공했지만 더 성장하지 못하고 곧 고꾸라졌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위대한 국가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다른 기제가 필요한 것이다. 관용과 개방성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포용력이 없으면 성장엔진은 곧 식어버린다.

로마가 위대한 국가로 불리는 이유는 배타성을 버리고 관용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정복자와 피정복자의 개념은 사라졌다.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갈리아인, 영국인, 스페인인, 시리아인들은 독립하기보다 로마인이 되기를 원했다. 로마가 오랜 기간 존속하면서 모두가 로마 사람이 되었다. 로마의 개방성은 로마의 융성을 가능케 했다. 이와 달리 일본은 일시적으로 부국강병에 성공한 나라일 뿐이다. 일본은 점령국 시민을 잔혹하게 대했다. 정복당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아무런 생각을 갖지 않았다. 일본은 항상 높은 곳에 있어야 했고, 모든 부와 권력을 자신들이 독차지했다. 일본인에게 피정복민은 노예일 뿐이었다. 로마는 모든 사람을 로마인으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은 막았다. 그래서 일본을 위대한 나라로 부르지 않는다. <제국의 미래>를 쓴 에이미 추아 교수의 지적처럼 국가들은 관용을 베풀 때 성장했고 이를 잃어버렸을 때엔 몰락했다. 불관용과 외국인 혐오, 그리고 인종적, 민족적 순수성에 대한 촉구가 시작되는 순간 위대한 국가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트럼프는 자기 나라만 잘살면 된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야만으로의 ‘자멸적 노력’이다. 그는 위대한 국가의 길과는 정반대편으로 가는 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