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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한 초원을 달리는 꿈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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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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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ㅣ리쓰메이칸대 코리아연구센터 연구고문

   
 

몽골이라는 울림에 마음이 설레었다. 마음 한구석에 한 번은 가야겠다는 짐이 자리하고 있었다. 몽골의 한 가운데 아르한가이(Arkhangai)의 수도, 체체를레그(Tsetserleg)시와 교류하는 윤봉길기념사업회의 방문단에 편승한 초행길은 험난했다.

나는 7월8일, 일행에 하루 앞서 떠났다. 오후 2시30분발 몽골항공 DM0301은 울란바토르에 부는 큰바람 때문에 5시로 출발시간이 늦춰졌다. 탑승 후에도 비행기는 한동안 뜨지 않다가 6시에 출발했고, 자정 다 돼서야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날 일행을 만나 오후 2시에 아르한가이로 떠났다. 600㎞, 8시간의 길이라고 한다. 13명의 일행과 가방을 잔뜩 실은, 한국 유치원에서 쓰던 17인승 미니버스는 위태로워 보인다. 몽골 유일의 횡단고속(?)도로는 울란바토르를 벗어나자 파도치듯 울퉁불퉁했고, 군데군데 구덩이가 파여 있다. 동자같이 둥그렇게 살이 붙은 기사는 닳아서 골이 없어진 타이어를 살펴본다. 가끔 펑크가 난다고…. 가다가 주유소나 길가 가게에 화장실이 있기는 하지만, 분뇨가 너무 쌓여있어 사람들은 여성을 포함해서 들판에서 볼일을 본다.

날은 어두워지고, 저녁 식사 자리가 예정된 카라코룸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들판에 시트를 깔고 물을 끓여 컵라면과 햇반, 김치로 식사한다. 왼편에 해가 지고, 오른편에 달이 오른다. 약초로 촘촘히 덮인 넓은 초원은 향기가 그윽한 짙은 수박빛으로 저물어 간다. 풀밭에 사지를 뻗고 누우려고 보니 초원은 소, 말, 낙타, 양의 똥으로 가득 찼다. 눈에 삼삼한 푸른 아르한가이에 다다른 유목민들은 저절로 엎드려 신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다고 한다. 그 아르한가이에 우리는 새벽 2시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전국 각지에서 경마, 활쏘기, 씨름의 세 가지 전통 경기와 갖가지 노래, 음악이 펼쳐지는 몽골 최대의 민족축제, 나담이 시작된다. 시 경기장에서 개회식이 시작됐다. 주석단에 오른 우리에게도 큰 청화백자 항아리에 담은 마유주와 달콤한 치즈 과자가 돌아왔다. 미지근하고 비릿한 마유주는 역겨웠다. 오전 행사가 끝나고 호텔에 돌아오니, 엄청난 모래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호우가 쏟아졌다. 비는 한두 시간 만에 그쳤고, 저녁에 냇가의 게르(천막 집)에서 연회가 열렸다. 해마다 윤봉길축제에 참가하고 체체를레그시에 윤봉길거리를 만든 남질도르지(Namjildorj) 전 시장은 손질한 돼지 한 마리와 양고기를 들고 게르를 찾았다. 날카로운 몽골 칼로 돼지를 넓적하게 포 떠서 불판에 구워 소금 뿌려 먹었다. 어둑어둑한 천막 안에서 여러 사람이 집어 먹느라, 제대로 구워졌는지 분간할 수가 없다. 식욕도 없어서 몇 개 집어먹다 말고 호텔로 돌아가서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설사가 계속돼 다음날은 호텔에서 누워 지내야 했다. 6박7일의 여정은 비행기 왕복에 하루, 버스 왕복에 하루, 식중독으로 하루가 소진되는 처참한 결과였다. 게다가 마지막 날 겨우 찾아간 코리아나 호텔은 폐허였다. 들어서자마자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고 방 안 화장실엔 변좌도, 물탱크의 덮개도, 물 내리는 손잡이도 없었다. 도대체 공짜라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다. 이 최악의 몽골 여행에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칭기즈칸이 이루어낸 몽골제국의 자취는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는 와중에 사라지고, 1924년 소련에 이어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를 세웠다고 하나 실제는 소련의 위성국이었다. 소련 붕괴 후 1994년에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몽골국으로 새 정체성을 모색하여 오늘에 이른다. 내가 몽골에 도착하기 전날 있었던 대선 결선투표에서 민주당 후보가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당 후보를 이겼다. 외교적 다변화가 전망되지만, 중국과 러시아에 끼여 있는 나라는 양국의 절대적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독립성의 강화를 위하여 부심해왔다. 1992년 구 체제의 붕괴와 더불어 발표된 ‘비핵화선언’은 그러한 의지의 표명이리라. 인구 300만명, 군대 9100명의 나라에서 힘에 의한 안전보장은 거의 의미가 없다. 가을에 개최될 ‘동북아 평화회의’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만난 바산자흐 하가와(Baasanjav LKHAGVAA) 교수의 명함에 ‘코리아 통일을 위한 몽골 포럼’ 회장이라고 찍혀 있어서 물었다. “한반도 통일이 몽골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웃 나라가 잘돼야 우리도 잘되지요, 몽골과 남북한은 초강국들의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강대국들의 국제 정치·외교적 환경 속에서 몽골과 남북한 양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다 굳건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고독한 유목민은 나그네를 환대하지만 가족 단위로 독립적이고, 서로에게 냉담하다고 한다. 같이 몰려다니면 가축이 먹는 풀이 금방 고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유목민이 갈증난 가축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찾아오면 두말 없이 물을 나누어 준다고 한다. 자기들도 언제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보를 힘의 논리에 따른 ‘제로섬’ 게임으로 보지 않고, 서로 공생적으로 이어지는 ‘공통의 안보’ ‘공공의 안보’로 보는 사고와 가깝다고 하겠다.

하가와 교수는 김일성대학을 나와 평양 주재 몽골대사관에 근무하고, 서울에서도 오래 근무했다. 우리말에 능통하고 논문도 쓴다. 2년 전에 ‘통일포럼’을 만들어 몽골에서 통일 여론 환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한다. 특단의 이해관계가 없고, 남북을 다 잘 아는 유목민의 시각이 매우 흥미롭다.

나에게는 몽골과의 소중한 연결고리가 더 있다. 암수술 후 1979년 가을, 어머니가 대구 감옥에 면회를 오셨다. “어머니, 다시 태어나면 뭘 하고 싶어요?” “몽골에 태어나서 말 타고 들판을 달려볼까.” 전혀 뜻밖의 대답이다. “왜요?” “사람도 없고 넓으니까 좋지 않아?” 통통한 어머니가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는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우습다. 그러나 시대와사회제도와 여성이라는 틀에 짓눌린 어머니의 평생을 생각하면, 결코 기발한 생각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다시 조선에 태어나서 너희들과 살고 싶다”고 하는 모범답안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인기척 없는 망망한 초원을 달리는 꿈….(<옥중 19년>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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