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덕 /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장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아베 신조 총리와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 함부르크에서 G20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뤄진 한일 정상회담이 열린 지 두 달 만이다. 이 회담에서는 무엇보다도 북한의 6차 핵실험 후 북한의 급박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한일 공조협력을 다짐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한일 정상은 북한과의 대화보다는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데 합의하고 원유 공급 중단과 같은 더 강력한 유엔 대북제재를 추진하는 데 공조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가 제재에 동참할 수 있도록 최대한 설득하기로 의견을 함께했다.

아베 총리는 이 자리에서 강제징용 보상 문제는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는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문 대통령은 그 부분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며 합리적 결론이 나올 것이라고 언급하고, 이 문제를 한일 관계의 우선순위로 다루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피력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념 기자회견에서 강제징용자 문제에 대해 "강제징용자 개인이 상대 회사에 가지는 민사적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 한국의 헌재나 대법원의 판례"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에 아베 정부를 포함한 일본 정치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2015년 한일위안부합의로 이미 해결된 사안이라며 반발해 온 경위가 있다. 과거사 문제에 관한 미묘한 입장 차에도 불구하고 양 정상은 이 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면서 미래 지향적이고 실질적인 교류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이 자리에서 아베 총리는 한·중·일 정상회담에 문 대통령의 참석을 요청하고 문 대통령은 내년 2월 평창올림픽에 아베 총리가 참여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양국 정상의 상호 방문을 통한 긴밀한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에 공감을 표했다.

정부 출범 이후 4개월에 걸쳐 문 대통령은 두 차례의 정상회담과 6차례의 전화통화를 통해 과거사는 물론 북한 핵·미사일 문제, 경제협력, 사회문화 교류 등의 현안에 대해 수시로 솔직한 의견을 교환해 왔다. 위안부 합의에 관해서 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정서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외교부 내에 위안부 합의 검토 TF를 설치하며 위안부 재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사 문제와는 별도로 한일 간 협력 사안에 대해서는 미래 지향적인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을 추구하겠다는 이른바 대일외교의 투트랙 접근 자세를 일관되게 천명해 왔다. 이는 위안부 문제에 올인하여 대일 관계 전체를 동맥경화에 빠트렸던 지난 정부의 대일 외교와는 차별화된 새로운 어프로치라 할 수 있다.

바야흐로 동북아 국제정세는 급속하게 일변하고 있다. 북한발 핵·미사일 위기는 레드라인을 향해 질주하며 동북아 국제 관계의 게임 체인저로 급부상했다. 동북아 각국이 생존과 안보를 담보하고 배타적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쟁투를 벌이는 정글로 점차 변하고 있다. 즉 18세기 유럽의 국제정치를 지배했던 세력 균형과 지정학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 관계 역시 송두리째 변화하고 있다. 당분간 위안부,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는 안보협력 어젠다에 밀려 부차적인 이슈로 잠복될 전망이다.

따지고 보면 북한의 점차 고도화되는 탄도미사일과 핵 위협의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한일 양국이다. 북한은 한미동맹에 맞서기 위해 주일미군 후방기지에 대한 공격을 공언해 왔고 마침내 지난 8월에는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여 일본 열도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바 있다. 한일의 굳건한 대북공조 체제 가동은 이제 새롭고 긴급한 안보 현안이 되고 있다.

한일 외교협력은 미국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미·중 빅딜 시나리오 견제를 위해서도 긴요하다. 한반도가 미·중 양국의 전략적 흥정거리로 전락되어선 안 된다. 만약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좁은 안보이익만을 고려하여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핵동결 및 핵확산 금지 그리고 ICBM의 포기를 전제로 북한 핵·미사일과 타협한다면 한일 양국엔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상황은 한일의 외교안보 공조와 협력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