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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SF에 없는 미 첫 한인타운 형성도산 공화국(2)
장태한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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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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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한 곳 집단 거주하며 공동체 형성
직업소개소 통해 취업 기회 제공
미혼 남성 중심이 아닌 가족 중심
학교 세워 정체성 교육도 중요시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초석을 다진 곳이 바로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이다. 도산 안창호는 1903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친목회를 리버사이드 한인들을 중심으로 공립협회로 발전시켰다. 또한 1906년에는 도산 안창호와 지인들이 리버사이드에서 신민회를 발기하고 도산은 한국으로 가서 신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시에 1905년부터 형성된 한인 타운이 미 최초의 한인타운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새로 발견된 자료에 근거해서 이선주가 주장한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이 미국 최초의 한인타운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도산의 리버사이드 생활과 활동에 대해 처음으로 연구한 사학자 이선주는 "도산의 59년 생애에 있어서 이처럼 중요한 리버사이드의 생활과 활동이 그동안 적절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연구의 대상에서조차 제외 되어 왔다. 이곳의 지명이 '하변(Riverside)'으로만 알려져 있어 그 곳이 캘리포니아에 있는지 아니면 만주나 시베리아의 어느 벽지인지조차 모르는 이들이 많다"라고 밝히며, 도산 연구에 있어서 리버사이드는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연구 대상에서 조차 제외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선주는 도산의 미주 활동에서 리버사이드의 중요성을 최초로 제기한 사학자로, 그의 공로는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는 미 최초의 한인타운으로 불릴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가? 미국으로의 집단 이주는 1903년 1월13일 하와이 이주로 시작됐으며 미 본토에는 1910년대에 1000명 미만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하와이가 미 최초의 한인타운이 아닌가? 그러나 하와이에 도착한 대부분의 한인 노동자들은 여러 섬의 여러 사탕수수 농장으로 흩어져 거주하면서 농장에서 일하고 살았기 때문에 따로 한인타운을 형성할 수 없었다. 실제로 1903년 하와이 최초의 한인 교회인 한인 감리 선교회(Korean Methodist Mission)의 명단을 보면 대부분의 주소는 이화 (Ewa) 사탕수수 농장이다. 참고로 당시 하와이 지역은 감리교단에서 선점하여 장로교는 선교활동을 못했고 많은 한인 장로교인들이 불만을 나타냈다는 기록도 있다.

동시에 1904년 이전 샌프란시스코에는 약 50명에 못 미치는 소수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중국인에게 인삼을 파는 인삼 상인들이었다. 또한 하와이에서 본토로 이주한 한인들은 대부분 가방 한 개만 갖고 왔기 때문에 빈곤과 가난, 언어 문제에 직면했다.

하와이에서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서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또한 극심한 인종 차별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제대로 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샌프란시스코는 본토 이주 한인들의 임시 거주지였으며 취업을 위해 타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한인타운을 형성하지 못했다.

하와이에서 건너 온 한인들 중 일부는 광산업에 종사하기 위해 유타와 와이오밍 주로 이주했고 또 다른 일부는 철도 건설 인부로 일했다. 나머지는 리버사이드의 오렌지 농장에 취업했다.

따라서 1905년부터 형성된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가 미 최초의 한인타운이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가 한인타운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한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모여서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였고 그곳에서 자체적으로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면서 민족 공동체를 형성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 바로 파차파 캠프이다. (도산 공화국)

(2) 직업소개소를 창업하여 이주 한인들에게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한인들이 모여들어 한인타운 형성이 가능했다.

(3) 미혼 남성 중심의 타지역 한인 거주 지역과는 달리, 여성과 아이들이 함께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결혼식, 생일잔치, 강연회 등 활발한 한인 공동체 활동을 전개했다. 도산의 장남 필립은 1905년 LA 병원에서 출생했으나 도산 가족은 리버사이드에 거주했고 차남 필선은 1912년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다.

(4) 한인 장로 선교회를 조직하여 예배 활동, 영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학교를 설립하여 자녀 교육과 정체성 교육도 중요시 했다.

(5) 도산 안창호는 특유의 리더십으로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1905년에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1906년에 신민회를 발기 했으며, 1909년에 대한인국민회와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단체들은 민족 공동체를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도산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한인타운은 민주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리더십 아래에서 형성되었고 공동체의 전범이 되었다.

(6) 리버사이드 거주 한인들이 '일본 식민국민'이 아니며 미주 한인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직접적 동기를 마련해 주었고 미주 한인들은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파차파 캠프, 즉 도산 공화국은 단순히 계절노동자들의 임시 거처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는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주로서, 계절에 따라 노동자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주하면서 일을 했으며 지금도 주로 남미 출신의 노동자들이 이주하면서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그들을 임시 계절노동자로 지칭한다. 20세기 초에는 남미 출신 노동자뿐만 아니라 아시안 이민자들이 임시 계절노동자로 일을 했다. 그러나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는 단순히 임시 노동자 캠프가 아니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파차파 캠프는 1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사는 미국 최초의 마을로서 각종 행사가 열렸고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 또한 그 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고 교회에 의해 종교 생활과 학교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결국 파차파 캠프는 초기 한인 사회의 모태가 된 곳이며 가장 큰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형성되고 운영된 곳이다.

도산이 한국에서 리버사이드로 돌아온 직후인 1911년 11월 23일에 대한인국민회 총회는 리버사이드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왜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가 개최되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물론 도산의 가족이 리버사이드에 거주했으며 리버사이드 파차파 캠프의 한인들이 초기 미주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버사이드에서 대한인국민회 총회가 열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파차파 캠프는 초기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 도산의 주도로 세워진 정치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대표 모임의 한 장면.
   
▲ 도산의 주도로 세워진 교육단체인 흥사단 임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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