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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총회 부회장 폭행해 대의원직 박탈돼도산 공화국 <14>
장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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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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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

박용만씨 구타한 오진국씨
하와이 가던 중 사고로 사망
한인 학생 양성소도 설립
타지역 독지가 학비 지원

   
▲ 리버사이드 한인타운에 거주했던 한인들의 기록이 정확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사료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다만 후손들이 미처 버리지 못했던 선조들의 사진들과 미국 센서스 기록,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단편적인 자료들이 당시를 복원하는데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사진은 박상수씨의 생일 잔치 모습. 촬영일이나 누가 누구인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다.

▶ 정등렵

정등렵에 관한 기록은 1906년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공립신보' 1906년 6월 30일자에 기사에 "양씨권학. 회원 위영민, 정등렵 양씨가 학원에 들어가서 곤란을 참고 학업에 근실한 고로 총회에서 열성으로 공부하는 것을 치하하고 예물을 보내는데 차등 학생과 같이 한다더라"고 쓰고 있다.

그는 매우 명석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06년 리버사이드에서 소학교 7반에 입학하였고 1907년 4월 28일에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다. '공립신보'1907년 12월 13일 기사에 "솔트레이크 통신을 의거한즉 방건초 씨가 교육을 장려하여 학생 정등렵 씨에게 5원, 정봉화 씨에게 5원, 차의석 씨에게 3원씩을 매달 보조한다 하니 방씨가 사회에 열심 있는 것은 세상이 다 감복하는 바이거니와"라고 쓰고 있다.

1907년에 정등렵은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한인들의 조력으로 공부를 계속했고 특히 솔트레이크의 방건초라는 인물은 그의 교육 장려를 위해 지원금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기사를 통해 그의 수학 과정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소학교를 일찍 마치고 중학교까지 학년을 높여갔다.

1909년에는 클레몬트 한인 학생 양성소의 회장으로 선출된다. 이후 1950년 12월 10일에 흥사단소에서 개최된 흥사단 제 37차 북미대회에서 대회 주석 위원장을 역임하는 것으로 보아 미주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1920년 미국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정등렵은 38세로 캘리포니아 다뉴브에서 가스 회사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었다.

▶ 한기갑

한기갑은 1906년 4월 1일 한인 장로 선교회에 가입했다. 그의 리버사이드에서의 행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갈보리 장로교회 한인 명단에 1907년 11월 11일 LA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클레어몬트로 이주하여 클레몬트 한인 학생 양성소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학생 양성소 설립에 크게 힘썼다. 1908년에는 한기갑 자신이 학생 양성소에 소학 7학년으로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학생 양성소의 취지에 가담하였을 뿐 아니라, 양성소에서 개최하는 토론, 연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애국지사를 배출하기 위한 교육 운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1908년 핸포드 지방회 설립을 청원하였던 재류 한인 중 한 명으로, 캘리포니아 핸포드에 거주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활동 내역에 다른 재외 한인들의 흔적이 눈에 띄는데, 특히 같이 수학하였던 정등렵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을 듯하다.

▶ 오진국

오진국은 1906년부터 리버사이드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리버사이드 지역 한인회에서 학무, 회계 등을 담당하였고, '공립신보'의 리버사이드 지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지역 학생의 어려움을 보고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어 돕거나, 젊은 동포의 애석한 죽음을 신문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 동포애와 애국심 또한 강했던 인물이었다.

1907년부터 덴버, 스톡턴, 솔트레이크시티, 샌프란시스코, LA 등을 돌아다니며 한인들의 정황을 파악하고, 각 지역 한인회의 임원으로 참석하였다. 그는 1908년 말까지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1909년부터 급격히 활동이 줄어들었고, 급기야 '신한민보'에 그가 최근 불미스러운 행동과 쟁투를 일삼는다는 비난의 글이 게재된다.

이후 한동안 그는 '신한민보'의 정간을 막기 위한 성금을 모으고, 국민의무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등 건전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업무를 이행하며 지냈다. 이때에 그는 캘리포니아 스탁턴에서 이발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1915년 7월, 오진국은 중앙총회 부회장 박용만 씨를 구타한 혐의로 리버사이드 지역 한인회 대의원직을 삭탈당하게 된다.

'신한민보' 1915년 7월 22일의 기사에서 "스톡턴에서 이발 사업하는 동포 오진국은 본월 십이일에 본 항에 들어와 중앙총회 부회장 박용만 씨를 구타하여 박 씨는 다리가 상하여 백인여관으로 돌아와 치료하고 오진국은 본처로 돌아갔다. 그 사실을 듣건대 오 씨가 박 씨에게 대하여 신한국보를 하와이 지방 총회로 환본하는 것과 중앙총회 부회장을 사면하는 것을 당시로써 놓으라 하여 박 씨는 사실을 변명할 여가가 없음으로 이 두 가지를 써서 오 씨에게 준지라. 이 사건이 다 공체에 관한 일이매 개인의 행동으로써 할 바 아니다. 그럼으로써 비공식이오 또는 부정당한 거동이라는 물론이 많다더라"라고 하였다.

오진국은 이 판결에 불복하고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위원회의 판결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오진국은 갑자기 하와이행을 결심하여 9월 30일 하와이로 향하는 소노마 선에 탑승하였고, 배가 하와이로 향하던 도중, 오진국은 물에 빠져 사망하게 된다.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자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자살로 추정하는 여론이 우세하다.

오진국 사망 소식을 '신한민보'는 1915년 11월 11일 1면에 "태평양에 장사한 오진국"이라는 제목으로 "9월 30일 상오 2시 40분에 하와이로 가던 소노마 선편에 우리 동포 오진국 씨가 횡사함인지 자살함인지 그 죽은 경우난 리가 알지 못하거니와 그 죽은 사실이 분명함은 … 오 씨는 일찍 미주 한인 사회의 창립시대부터 오날날까지 자기의 생력을 다하여 힘쓰던 사람이라 한번 오 씨가 금년 칠월분에 국민회 중앙 총회 부회장에게 무례한 실수가 있은 후에 여러 사람의 동정을 스스로 끊고 홀로 비관에 처하였었도다."라고 보도했다.

오진국은 미주 한인 사회 창립부터 많은 공헌을 한 인물임을 '신한민보'는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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