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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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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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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규 / 논설위원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던 1908년 10월21일. 한 중년인이 이날 처음 개소한 서대문형무소의 교수대 앞에 섰다. 1만여명으로 구성된 13도 연합의병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 진공작전’을 펼쳤던 항일 의병장 허위였다. 포승에 묶인 채 교수대로 향해 걸어간 허위는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55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서대문형무소가 삼켜버린 첫 번째 애국선열의 피였다. 나라를 되찾은 후 그가 받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호는 그를 기리는 후대의 작은 기억이었다.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어 1987년 의왕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80년간 감옥으로 사용됐던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선대가 겪어야 했던 아픈 과거의 상흔이었다. 일제 식민시대에 의병 또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곳을 거쳤다. 모진 고문을 겪고 정원 7~9명에 좁은 공간에 최대 48명이 함께 지내는 열악한 감방생활도 감내해야 했다. 이런 서대문형무소 문을 오간 애국지사는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를 포함해 모두 4만여명에 달한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일제 시기에 무려 400여명이 모진 고초를 견디다 못해 옥사하거나 처형을 당했다. ‘광야’에서 ‘백마 탄 초인’을 부르짖던 이육사 같은 저항시인부터 이완용을 칼로 찌른 정평(定平) 농민조합 지도자 이재명,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에 실패한 송학선, 만주 독립운동전선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 등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독립투사까지 여기에 속했다. 서대문형무소가 저항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 후 첫 3·1운동 기념식 장소로 서대문형무소를 선택했다. 3·1운동의 상징성과 현장성을 살려 국민이 참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소로 이보다 가장 적합한 곳은 없다는 게 정부의 판단일 터다. 수많은 선대 순국선열들의 저항의식과 피가 어린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서 과연 선대가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나라의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고민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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