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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사람이 살고 있었네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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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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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주 / 편집국 부국장

   
 

‘사람이 살고 있었네.’ 1993년 소설가 황석영이 내놓은 책이다. 89년 남북작가회담 참석차 평양에 다녀온 방북기로 그곳에도 남한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난 1일 북한 주민들의 사진이 몇 장 공개됐다. 평양에 간 남한 예술단 취재진이 숙소인 고려호텔 주변에서 찍은 것이다. 놀랍게도 이들은 서울 시민 못지않게 세련되고 화려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걸어가는 젊은 여성,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 우리 취재진을 의식해 일부러 연출한 풍경이라고 하기엔 자연스러워보였다. 이들을 보며 새삼 든 생각. 평양,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우리와 비슷한.

남한 예술단 공연에 온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닮아 있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 부르고, 흥겨운 리듬에는 몸을 흔들었다. 특히 걸그룹 ‘레드벨벳’이 히트곡 ‘빨간맛’을 부르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에서 ‘레드벨벳’의 ‘빨간맛’이라? 그것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80년대만 해도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빨강’에 대한 두려움은, 부르는 이에게나 보는 이에게나 온데간데없었다. 취재차 평양에 간 회사 후배에게 SNS 메시지를 보냈다.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서울에 있는 것처럼 연결됐다. 뭐지? 내가 지금 평양에 있는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은 건가.

북한에선 한국 가요를 듣거나 드라마를 보지 못한다는 게 우리 상식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지난해 개봉한 영화 ‘강철비’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북한 최정예 요원의 어린 딸은 한국 가수 지드래곤의 팬으로 항상 그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남한 가요를 적대시하는 북한 요원은 딸에게 그딴 노래는 듣지 말라고 하지만, 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북한의 실상을 다룬 책 ‘조선자본주의공화국’에 따르면 실제로 북한 젊은이들의 MP3 플레이어 수록곡은 대부분 한국 가요다. 불법이어서 적발되면 처벌을 받는데도 이들은 K팝을 듣는다.

로이터 통신과 이코노미스트에서 각각 서울 주재 특파원을 지낸 제임스 피어슨과 다니엘 튜더가 쓴 이 책은 핵무기에 가려져 미처 알지 못했던 북한 주민들의 삶을 낱낱이 드러낸다.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평양에서는 휴대전화가 없는 젊은이는 ‘루저’로 취급받고, 사회생활을 즐기기도 어렵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모두 한국의 대중가요를 즐겨 듣는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TV 프로그램에 중독돼 가고 있다. 매개체는 중국에서 들어온 USB. 한국의 방송물을 갖고 있다가 체포되어도 대부분은 뇌물을 주고 풀려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과 실제는 많이 다르고,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상당히 많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2018년 4월, 한반도에 봄이 오고 있다. 믿기 어려운 봄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이다.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곳이었던 한반도, 금방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았던 이곳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를 시작으로 올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다. 최근에는 북·중 정상회담까지 성사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오는 27일, 우리는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평양 공연의 부제는 ‘봄이 온다’였다. 남한 예술단 공연이 남북 관계의 평화적 전환을 알리는 계기가 되길 기원하는 의미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기류는 남북 정상회담에 앞서 어쩌면 북한 주민들 내부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국 가요를 듣고 드라마를 보며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에 스며들면서. 때론 문화가 정치보다 힘이 세다. 공연이 아직 한 번 더 남았다. 이번엔 남북합동 공연이다. 평양 공연이 한반도 위대한 여정의 또 다른 시작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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