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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工이 조선에 남았다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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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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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 / 문화1부 차장

   
 

마을 입구에 '일본 자기 발상의 땅[日本磁器發祥の地]'이라 적힌 표지판이 보였다. 규슈 북서부 아리타(有田). 지난달 9일 조선일보 주최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에 참여한 초·중·고 교사 243명과 함께 찾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14대 이삼평(李參平)입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초로(初老)의 사내는 또렷한 우리말로 인사한 후 집안 내력을 자세히 들려줬다.

시조(始祖)는 충남 공주 출신 도공(陶工) 이삼평(?~1655). 임진왜란이 끝날 때쯤 바다를 건넜다. 아리타를 포함한 히젠(肥前·현 사가현) 지역 영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조선 침략 후 철수하면서 그를 데리고 갔다. 이삼평은 아리타 동부 이즈미산에서 양질의 백토를 발견하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백자를 만들었다.

이삼평은 죽어서 일본의 신(神)이 됐다. 사망 후 3년 만인 1658년 마을 사람들이 '도잔(陶山)신사'를 세우고 그를 신으로 모셨다. 1917년엔 마을 언덕에 '도조(陶祖) 이삼평 비'를 세웠다. 매년 4월 말 도자기 축제를 연다. 115회째인 올해는 지난달 29일부터 열리고 있다. 인구 2만명 작은 마을에 관광객 200만명이 몰린다. 5월 4일엔 도조제(祭)를 지낸다. 14대 이삼평은 "후손으로서 한·일 우호에 힘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삼평이 임진왜란 당시 스무 살이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여든셋까지 살았다. 일본으로 건너갈 때 20대 중반이었다. 거장(巨匠)이라 하기엔 이른 나이였다. 조선에 남았더라도 남다른 노력으로 분명 대가가 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름이 역사에 남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과문(寡聞)한 탓이지만 조선 도공 중 이름이 남은 이를 알지 못한다.

이삼평이 만든 화려한 채색 자기는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도잔신사 기록에 따르면 1650년 145개가 처음으로 수출됐다. 9년 후엔 네덜란드가 5만6700개를 수입한다. 명·청 교체기 혼란을 피해 중국의 경덕진(景德鎭) 대신 일본으로 수입선을 바꾼 것이다. 반 고흐 등 인상파 화가들이 도자기를 싼 포장지 우키요에(일본 풍속화)를 보고 영향을 받았다.

이삼평이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면 이런 세계사적 교류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도자기 수출로 축적한 부(富)를 토대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이 결국 침략으로 나아갔다는 비판도 있다. 그건 이삼평의 잘못이 아니다. 산업을 말업(末業)으로 여기며 권력 싸움에 몰두하느라 조선의 '이삼평'을 키우지 못한 우리를 탓해야 한다.

조선 도공 이삼평을 도조로 기리는 일본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다. 정치 싸움에 혼을 빼앗겨 지금도 돌보지 않는 미래의 '이삼평'이 있을지 모른다. 도조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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