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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정신의 위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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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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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언제부터인지 한국사회에서도 ‘인문’과 관련된 여러 가지 소식이 넘쳐난다.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인문학 강좌, 인문기행, 인문콘서트, 인문 콘텐츠 등 인문이란 단어와 연관된 행사에 관한 소식이 제법 많다. 대학에서는 기존 인문학과가 아예 퇴출되거나 통폐합되는데, 대학 밖에서는 오히려 인문학과 관련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줄지어 열리고 있다. 내용도 동서고금의 고전강독에서부터 미술관, 박물관, 사적지 탐방, 나아가 디지털 시대의 여러 문화장르 간의 새로운 접목 시도까지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분위기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독일 현대회화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전을 찾았다. 관람객이 너무 많이 몰린 까닭에 시간대에 따라 예약된 관람객만 입장시켰다.

인문은 동양에서 주로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지칭했고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면 이로써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논어>의 가르침에 따라 정신세계를 도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서양에서 통상 ‘후마니타스’라 불렸던 인문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신을 중심으로 구성된 중세의 세계관을 뿌리째 흔들었고 신의 자리에 인간을 올려놓았던 고대 로마의 문예를 부흥하면서 근세의 시작을 알렸다. 후에 괴테가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는 아예 세속과 타락의 대명사로 여겨졌던, 바로 그 로마를 찾아 떠난 이탈리아 여행이 이 의미를 다시 확인했다.

물론 신을 전제하지 않는 인문정신은 계몽기의 유럽에서도 위험한 지적 모험이었다. 유교에 심취했던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는 <중국인의 실천철학> 속에서 신에 대한 개념 없이도 인간은 충분히 윤리적인 삶을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가 프러시아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정작 유교적 인문세계에서는 이 같은 내적인 도전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성리학의 형식에 치우친 윤리관에 대하여 인간의 생명력과 그 심연에 놓여 있는 ‘마음’을 강조한 심학(心學)이나 양명학(陽明學)의 도전도 있었지만 유럽의 문예부흥이나 계몽철학처럼 인문정신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서양과 접촉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던 동양의 인문세계는 대체로 수구적인 자기방어, 동도서기(東道西器)식의 절충주의, 아니면 아예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근대주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흐름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사상적 혼미 속에 나타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근대의 초극(超克)’이었다. 쇠락해가는 서구적 근대보다 더 훌륭한 근대를 일본은 건설할 수 있다는 야심찬 기획이었다. 이는 미국 헤게모니에 도전하여 중국식 사회주의 가치 위에서 위대한 중국을 건설하겠다는 ‘중국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제 동서양은 과학, 기술, 정보시대를 거쳐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에서 인간 대신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시대의 문턱을 함께 넘어서고 있고, 지니는 문제의식도 상당히 비슷해졌다. 이 중 하나가 바로 인문정신의 역할과 관련된 논의다. 과학, 기술, 정보가 마치 인류의 마지막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에 지금까지 인문정신이 심어왔던 가치체계가 앞으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한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인문학이나 예술창작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데도 여전히 전시회나 음악회는 관객들로 붐빈다. 이러한 현상을 해명하려는 논의도 많이 있다. 이 중 하나가 이른바 ‘보상이론’이다. 우리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정신과학이나 예술이 더 필요한데, 이는 현대화로 인해 손상된 삶의 세계를 위한 보상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인문학이나 이에 근거한 인문정신의 수동적인 역할에만 주목하고, 결국에는 목적합리성만을 추구하는 ‘도구적인 이성’을 정당화한다. 인문정신은 바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정보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계몽의 과정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밝히는 비판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요즘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이른바 ‘힐링’처럼 현대화가 남긴 고통과 상처를 그저 어루만지는 데에만 역할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정신이 안고 있는 보편적인 과제도 있지만 구체적 조건에 따라 이에 접근하는 인문정신의 폭과 깊이를 헤아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민족문학’이나 ‘민족예술’에 대한 논의다. 2007년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민족문학’이라는 단어를 아예 삭제하고 ‘한국작가회의’로 개칭하였다.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이유는 문학이란 보편적인 인문정신이 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제약받을 수 있다는 데 있었다.

괴테는 독일 낭만주의에 뿌리를 둔 ‘민족시’의 경계를 넘어 페르시아의 시세계와 연결된 <서동(西東)시집>을 통해서 ‘세계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괴테를 ‘독일적인 사건’이 아니라 ‘유럽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던 니체도 ‘탈(脫)독일’이 바로 진정한 독일의 정신을 되찾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자 ‘비독일적인 문명문학’과 ‘독일적인 민족문학’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토마스 만(1875~1955)은 전자, 에른스트 융거(1895~1998)는 후자의 흐름을 상징하는 대표적 작가였다.

비록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패전이 남긴 독일사회에서는 절망감과 복수심, 우리에게는 분단의 상처가 민족문학과 민족예술의 존재와 그의 당위성 강조로 나타났다. <광장>의 작가 최인훈 선생의 서거 소식을 나는 최근에야 들었다. 민족분단에 기인한 반인간성을 직시하지 않고 디지털 시대의 문화산업이 제공하는 대량정보의 그물망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우리 인문정신의 현주소도 동시에 생각났다.

지구적 범위에서 이제 기술과 문화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문화소비양식도 네트워크 안에서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인문정신이 지니는 비판적 기능과 자기정체성의 확인작업도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문정신의 보고로서 추앙받았던 책을 비롯한 인쇄매체의 운명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책을 결코 대신할 수 없듯, 보다 더 인간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비판정신과 함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건강한 인문정신은 우리 삶의 영역으로부터 결코 추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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