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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가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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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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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 칼럼니스트·대기자

트럼프 비판한 익명의 고위관리 / “보수의 가치는 자유주의”
한국 보수에 자유주의는 없고 / 권위주의만 남았다는
윤석만 기자 지적에 귀 기울이길

   
 

지난주 때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에 목적이 있다면 그건 휴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 휴가에는 나름 목적을 담았으니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다. 1주일 동안만이라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를 최대한 멀리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쌓인 디지털 ‘독성(毒性)’을 조금이나마 털어내고 싶었다. 물론 100% 성공한 건 아니다.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보낸 문자와 카톡, e메일을 휴가를 핑계로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하루 두 번 정도는 스마트폰을 살짝 열어봤다.

신문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휴가에서 돌아와 그동안 쌓인 신문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모처럼 신문 읽는 맛을 느꼈다. 디지털 화면의 픽셀과 다른 프린트 활자의 무게와 정겨움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 신문은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이야”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낱개가 아니라 패키지로 하루를 정리하는 데는 역시 종이신문만 한 게 없다는 확신은 한물간 신문쟁이의 시대착오적 자만일까.

짧은 기간이지만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태풍과 지진으로 일본이 큰 타격을 입었다. 지진으로 홋카이도(北海道)에 발이 묶였던 한국인 관광객만 약 4000명이라고 한다. 경제와 민생에 발목이 잡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결국 50% 아래로 떨어졌다. 평양에 간 특사단은 3차 남북 정상회담을 평양에서 18~20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국내외 여러 뉴스 중 단연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뉴욕타임스에 실린 익명의 기고문 파문이다. ‘행정부 고위 관리’라고 밝힌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내 저항 세력의 일원’을 자처하며 대통령을 퇴진시킬 궁리까지 했다고 주장하는 글이 실리면서 백악관과 워싱턴 정가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럽다. 격노한 트럼프는 ‘반역자’ 색출에 나섰고, 부통령부터 각부 장관들까지 너도나도 “나는 아니다”고 공개 부인하며 ‘충성선언’ 릴레이를 이어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익명의 필자가 자유주의를 미 공화당이 수호해야 할 가치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그는 “공화당 대선후보로 당선됐지만, 트럼프는 보수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옹호해 왔던 이상들, 즉 생각의 자유와 자유 시장 및 인간의 자유 등에 친근감을 보이지 않았다”며 “기껏해야 준비된 대본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이상을 언급하는 것이 그가 보여준 최선이었고, 최악의 경우 이런 가치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다”고 지적했다. 자유주의가 미국의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임에도 트럼프가 이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윤석만 교육팀 기자가 최근 『리라이트』란 책을 냈다. ‘보수가 세워야 할 자유주의의 가치’란 부제가 달려 있다.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가 새로 태어나야 하며(re-right), 그 핵심은 자유주의의 가치로 무장하는 데 있다(liberal-right)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윤 기자는 한국의 보수는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보수의 외피를 걸친 권위주의일 뿐이란 것이다. 말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정작 자유주의에는 인색한 것이 한국의 보수이고, 경제적 자유주의만 강조할 뿐 젠더·다문화·성 소수자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서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게 한국의 보수란 것이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고려해 사회적 자유주의를 먼저 정착시킨 뒤 정치적 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단계적 접근을 제안하고 있다.

윤 기자는 한국의 진보 진영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자유는 보수의 핵심 가치이기 이전에 민주주의의 근본이지만 자유주의적 가치의 결여와 빈곤에서는 더불어민주당도 자유한국당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한국당의 ‘권위적 꼰대’들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들이 청와대와 민주당에 진을 치고 있는 운동권 출신의 ‘586 꼰대’들이란 얘기다. 보수의 재탄생과 동시에 진보의 각성을 촉구한 젊은 후배 기자의 노작(勞作)을 읽으며 그동안 나는 뭐 했나 하는 자괴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물론 자유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닐 것이다.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의 유발 하라리 교수가 최근 출간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에서 지적했듯이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촉발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자유주의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패러다임의 혁명적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4차 산업혁명의 선봉에 서 있는 미국의 보수도 여전히 자유주의의 가치를 부여잡고 있다. 한국의 보수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눈여겨볼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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