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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대첩으로 맺은 한국-체코의 인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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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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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 한민족센터 고문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체코군단. [주한체코대사관 제공]

청산리대첩은 항일전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승리로 꼽힌다. 승리의 요인으로는 독립군 부대의 탁월한 작전과 높은 사기, 일본군의 오판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독립군의 우수한 화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전투력을 얕봤다가 박격포·기관총 등 고성능 체코제 무기에 호되게 당했다. 아시아의 동쪽 끝인 한반도 국경지대에서 풍찬노숙하며 항일투쟁을 벌이던 독립군들은 어떻게 동유럽 국가 체코의 무기를 손에 넣을 수 있었을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체코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체코는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의 지배를 각각 받았으므로 체코군은 오스트리아군에 편입됐다. 유럽 동부전선인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와 싸우던 체코군은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러시아에 투항해 총부리를 반대로 돌렸다. 독일·오스트리아의 패전이 곧 조국의 독립을 의미했기 때문에 체코군은 용감하게 싸웠다. 러시아로 망명한 체코인들도 의용군을 조직해 합세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독일과의 전투보다 국내의 반혁명 세력을 누르고 정권 기반을 다지는 일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체코 망명정부는 프랑스와 협의해 러시아에 있던 4만5천여 명의 체코군단을 프랑스군에 배속해 동맹군과 싸우도록 했다. 그런데 독일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갈 수는 없으니 시베리아를 경유해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유럽의 서부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시에 있는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독립기념관 제공]

볼셰비키 정부는 독일 편을 들어 체코군단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으나 체코군단은 이를 거부해 반란을 일으켰다. 볼셰비키가 자신들을 식민 종주국인 오스트리아로 인도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체코군단은 러시아혁명 내전 속에 반혁명군(백군)의 일원으로 혁명군(적군)과 싸우며 숱한 무용담을 남겼다. 사실상의 망명정부를 이끌며 신문을 발행하는가 하면 한때 볼가강 연안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을 때 1차대전이 끝나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했다. 그러나 러시아 내전은 쉽사리 끝나지 않아 이들의 귀국길은 하염없이 늦춰졌다.

1920년 2월이 돼서야 체코군단은 볼셰비키 정부와 정전협약을 체결하고 배편 대신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들은 무기를 팔아 여비를 마련하려 했는데, 이때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최대 독립운동 조직이던 북로군정서가 사겠다고 제의해왔다. 독립군이 체코군단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는 박격포 2문, 기관총 6정, 소총 1천200정에 탄약 80만 발이었다. 당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를 상대로 쓰려던 이 무기는 일본군을 상대로 불을 뿜게 된다.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골동품 시장에는 당시 한국인에게서 무기 대금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비녀,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고 놋요강도 끼어 있었다고 한다. 군자금을 마련하려고 당시 선조들이 얼마나 눈물겹게 모금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 부대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청산리대첩의 주역 가운데 하나인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 '우둥불'에서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리며 우리에게 연민을 표시했고, 갖고 있던 무기를 우리에게 팔기로 결정했다"고 술회했다. 체코군단이 발행하던 신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 중일 때 일어난 한국의 3·1운동을 여러 차례 보도하며 피식민국 조선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드러냈다. 영국 로이터통신이 이를 인용 보도해 한국인들의 만세운동이 서구에도 널리 알려졌다.

야로슬라프 올샤 주한 체코 대사는 프라하 고서점 등지에서 수집한 한국 관련 자료를 2011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는데, 이 가운데 3·1운동 기사가 실린 신문도 포함됐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한 일본군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조선인 수백 명을 체포해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길거리에서 사살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체코군단 군인들의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과 한국의 인연도 소개했다. 미국 망명 중 대통령으로 추대된 토마시 마사리크 박사는 대서양을 건너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체코군단을 격려하고 기차로 한반도를 종주한 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돌아갔다는 것이다. 체코 건국사에서 체코군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려주는 일화다.

   
▲ 2011년 야로슬라프 올샤 체코 대사가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3·1운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체코슬로바키아는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꿈에 그리던 독립을 이루고 2년 뒤 체코군단도 정든 고향을 찾았지만 비운의 역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1920∼1930년대 동유럽 최고의 부국으로 성장하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 독일의 허수아비로 전락했다가 1945년 2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됐다. 1968년 권좌에 오른 둡체크가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소련군의 무력간섭으로 좌절됐다. 올해는 '프라하의 봄' 50주년이기도 하다.

1989년 동서 냉전이 막을 내리던 즈음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은 공산정권을 몰아내는 이른바 벨벳혁명에 성공했다. 1993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나라로 분리됐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90년 한국과 수교했으며 분리 이후에도 각각 교류협력을 지속해왔다. 이 가운데 체코와 한국 관계는 2015년 7월 보후슬라프 소보트카 총리 방문과 함께 전략적 동반자관계로 격상됐다. 체코는 한국의 20번째 전략적 동반자국가이며, 체코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한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었다.

체코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28일 오후(현지시간) 프라하에서 현지 동포들을 만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체코군이 귀환하면서 무기를 우리 독립군에게 팔았는데, 청산리대첩은 체코 무기의 우수성에 도움을 받은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100년 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기를 사고팔면서 시작된 한국과 체코의 오랜 인연이 21세기에도 꾸준히 이어지기를 빈다.

   
▲ 이희용 한민족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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