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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유효기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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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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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령 / 언론학 박사

   
 

“…내 몸은 다른 몸들과 함께 묵묵히 흔들리며 트럭에 실려갔어. 피를 너무 쏟아내 심장이 멈췄고, 심장이 멈춘 뒤로도 계속 피를 쏟아낸 내 얼굴은 습자지같이 얇고 투명했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본 건 처음이라 더 낯설게 보였어.”

2014년 발간된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한 장은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한 소년의 영혼이 자신의 죽은 몸 주위를 떠돌며 독백하는 것으로 쓰여있다. 죽은 자가 자신의 죽음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어떻게 죽어갔는가라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증언은 오롯이 망자의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폭동’에서 ‘사태’로, 다시 ‘민주화운동’으로 고쳐 불리는 동안 진실은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광주 유혈 진압을 지휘한 전두환씨가 1996년 내란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때, 진실은 비로소 어둠에서 빛으로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전두환씨는 구속된 이듬해 사면됐고, 2017년에는 회고록을 출판해 “계엄군 발포명령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군의 의도적, 무차별적 민간인 살상은 없었다”는 주장을 태연히 늘어놓았다.

광주에서 계엄군 헬기의 기총소사가 있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에 대해서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 “가면을 쓴 사탄”이라고 비난했다. 급기야 조 신부에 대한 사자(死者) 명예훼손 혐의로 광주지법에 서야 할 처지가 됐지만, 전씨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 “독감에 걸렸다”며 재판 출석을 거부해왔다. 전씨와 그의 지지자들에게 1980년 5월의 광주는 여전히 ‘뜬소문’일 뿐이다.

죽임을 당한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는 것. 평생을 두고도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입은 사람은 있는데, 폭력을 휘두른 장본인은 나는 그런 적 없다며 시치미를 떼는 것.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겪으면 사람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

“트라우마는 해소가 되면 과거의 일부가 되지만, 해소되지 않으면 그 과거를 현재형으로 살게 됩니다. 누군가가 상처를 주었는데, 그 상처를 준 사실마저도 아니라고 부정하면, 상처 입은 사람은 과거의 유리감옥 속에 갇혀 머물게 되지요.”

인지과학자 유정씨는 진실과 상처 치유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실이 망자와 함께 묻히고 말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억울함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 용산참사의 유족들이, 세월호의 부모들이,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목숨을 잃은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김용균씨의 어머니가 그 무엇보다도 먼저 “그렇게 된 이유를 알고 싶다”고 진상규명을 요구해온 것은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 1000일을 맞았을 때 한 어머니는 “세월호 이후 아무것도 밝혀진 것 없이 1000일이 흘렀다는 것은, 4월16일을 천 번째 살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현대사는 희생자에게 진실 보고의 책임을 떠넘겨왔다. 국가폭력이든, 권력과 자본의 폭력이든 가해자는 책임을 부인했고, 피해자들만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청을 높여야 했다. 어렵사리 밝혀낸 진실의 조각도 가해자들의 거듭되는 부인과 뻔뻔한 자기정당화로 인해 다시 진창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이러한 현대사의 학습효과는 암담하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불순분자들’로 낙인찍히는 것을 거듭 지켜보면서, 이웃들이 피해자의 억울함을 밝힐 진실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상식보다는 살아남으려면 피해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무관심과 피해자에 대한 냉대가 사회의 지배정서가 되었다.

지난 17일 제주지법은 제주 4·3 당시 군사재판을 받았던 생존 수형인 18명이 낸 ‘불법 군사재판 재심’ 선고공판에서 청구인들에 대해 사실상 무죄를 인정했다. 고문에 못 이겨 없는 죄도 지어내야 했던 생존 수형인들의 나이는 85세부터 99세다. 70년 동안 그들의 상처는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상처의 유효기한은 없다.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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