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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아메노모리와 신숙주는 없나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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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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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철 / 논설위원

"임진왜란은 명분이 없다."

   
 

일본인으로서 조선시대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1668~1755)이다. 에도시대 유학자였던 그는 20대 젊은 나이로 대마번 외교관에 임용돼 30년 동안 조선과의 외교 업무를 맡았고, 부산 왜관에 체류하며 조선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조선 소개서인 `교린제성(交隣提醒)`과 일본 최초의 조선어 학습서인 `교린수지(交隣須知)`를 펴낸 그는 평소 주변에 "조선과 외교할 때는 성심과 신의로 임하라"고 강조했다.

조선의 풍습과 문화를 존중해야 양국의 평화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후 득의양양한 자국민을 향해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가 오만해졌다"고 꼬집을 만큼 양국 갈등 해소에도 앞장섰다(민덕기 청주대 교수 `근대 일본 외교의 두 얼굴`). 반면, 조선인으로서 일본과 근린외교를 외친 인물은 신숙주(1417~1475)다. 1443년 조선 통신사의 서장관 겸 종사관으로 일본을 방문한 그는 7개월간 머물면서 주요 시설과 산천을 담은 지도를 작성하고 제도와 풍속 등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는 귀국 후 성종 지시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펴냈는데, 이 책은 개인 기행문을 넘어 조선시대 대일 외교협상의 지침서로 활용됐다. 죽음을 앞둔 그는 성종에게 "일본과 화(和)를 잃어선 안 된다"며 전략적 평화의 중요성을 간언했다고 한다.

요즘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로 촉발된 양국 갈등은 화해치유재단 해체 결정, 초계기 레이더 조준 등이 맞물리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양상이다.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대화는 오간 데 없고 편협한 감정과 극단적 분노만 넘쳐난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는 양국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 문재인정부가 내건 `적폐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로 반일 정서가 확산되자 아베 신조 정권은 `역사 수정주의`로 혐한 감정을 부추겼고 이 때문에 김대중·오부치 한일 파트너십 선언 등 양측이 힘들여 쌓아온 공든 탑마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자국 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 감정을 이용하려 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양국 현안을 조율하고 소통할 외교채널이 없다는 점이다. 현 정부 출범 후 대일 외교라인인 `재팬스쿨`은 한일 위안부 합의 후폭풍에 휩쓸려 초토화됐다. 지금이라도 국회, 관계, 재계,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등 모든 대화채널을 가동해 핫라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권 때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과 같은 물밑 채널이 있어야 양측 간 사소한 오해가 눈덩이처럼 부풀려지지 않는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선 양국 지도자가 역사적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재로선 쉽지 않다. 차라리 4월 퇴임하는 아키히토 일왕이 식민 지배를 사죄하고, 정부가 나루히토 왕세자의 새 일왕 즉위식에 특사를 보내 "새로운 미래로 나가자"고 제안하는 방안은 어떨까. 불행한 과거사는 배타적 민족주의 잣대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와 국제적 기준에 맞춰 접점을 찾을 때 상호 타협과 양보가 가능하다.

미·북 정상 간 담판 결렬로 일본과의 대북 공조가 더욱 절실해진 마당에 양국이 화해하지 못하면 동북아 평화는 물론 중국·러시아에 맞서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한일은 누가 뭐래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하고 실천하는 이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적(일본)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는 증오의 투쟁을 버리고 화합의 건설을 일삼아야 한다"고 했듯이, 서로를 협력의 동반자로 보면서 인내심을 갖고 100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지난해 양국을 왕래한 국민만 1000만명을 넘는다.

역사 논란이 더 이상 애꿎은 국민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관광·문화 등 다른 분야까지 발목을 잡지 않도록 투트랙으로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거 견원지간인 독일과 프랑스는 1963년 엘리제조약을 통해 청소년 등 대규모 교류를 추진함으로써 화해하고 유럽 통합을 주도했다. 한일도 다양한 차원에서 인적 교류를 늘리고 상호 문화적 경험을 쌓아 공감대를 찾는다면 평화와 번영의 길로 함께 나갈 수 있다. 신숙주와 아메노모리 호슈처럼 무지와 오해, 편견을 버리고 상대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때 상생과 공존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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