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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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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명 / 논설위원

   
 

올해 반일(反日)에서 큰 장이 설 걸로 봤다. 하노이 미·북정상회담 결렬 전까지는 그랬다. 강제징용 배상판결, 초계기 사태 등 작년에서 이월된 사건 진폭이 컸고 무엇보다 3·1운동 100주년이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40%대에 머문 지도 꽤 됐다. 한국 정치에서 반일은 모르핀 주사 같은 것이다.

임기 말 20%대 지지율과 레임덕에 허덕이던 이명박 정권은 2012년 8월 독도 방문으로 기사회생했다. 오래가진 못했지만 어차피 임기는 한 번이다. 역대 정권이 한 번씩은 이 주사를 맞았다. 더 큰 이유도 있다. 문정부는 올해 남북관계에서 사변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하노이에서 미·북 종전선언이 나오고, 3월 말 혹은 4월 초에 김정은이 서울을 다녀가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을 재개하고, 남북 도로와 철길을 잇고…. 이 구상을 담은 `신한반도체제` 선언이 삼일절 대통령 연설로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루 전 하노이 회담이 `쫑나는` 바람에 구체적 실천방안이 연설문에서 잘려나갔다. 이날 연설에서 주목받은 건 일제시대 빨갱이사냥 비판이었다. 그게 좀 뜬금없는 느낌을 준 것은 연설문을 고쳐 쓰면서 맥락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원래는 남북교류 청사진을 먼저 제시하고 여기에 딴지 걸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로 빨갱이 얘기가 들어갔던 것 아닐까. `민족협력 비판하면 친일파`의 프레임 같은 것 말이다. 반일이 개입되어야 민족 대 반민족 전선 구획이 용이해진다.

하노이 회담은 반일을 지렛대 삼은 대북지원 구상을 좌절시켰다. 그래도 청와대는 금강산-개성공단 카드를 접지 않는다. 그걸 존 볼턴, 스티븐 비건이 나서 반박하는 희한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요즘 외신에서 한반도 전문가들의 코멘트를 읽다 보면 "(한국) 쟤네 왜 저래?" 하는 수군거림이 느껴진다. 죽은 아들 ○○ 만지기쯤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정부의 민족주의 집념을 간과하는 것이다.

어쨌든 반일만 갖고는 남북관계 변전을 이뤄내기 어려워졌다. 국내 보수세력을 반민족 세력으로 봉인하면 될 듯했는데 미국이라는 큰 산이 가로막고 나섰다. 반일보다 몇 배 큰 지렛대가 필요하다. 한국 정부가 대놓고 반미를 표방하거나 갈 데까지 가는 상황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곡예를 탈 수는 있다. 남북 정상이 조만간 만나 금강산 재개 등에 합의한다고 치자. 그것이 유엔 대북제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내세울 것이다. 미국이 주권국인 한국에 대놓고 "하지 말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한미관계는 골병이 든다.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한미 양국의 그다음 선택이다. 과연 미국은 세컨더리 보이콧 혹은 비공식 수단으로 한국을 제재할 것인가. 이 정부는 제재를 무릅쓰고 남북교류로 나갈 것인가. 이쯤 되면 한미동맹은 요단강을 건넌다.

이 정권은 한미관계의 결정적 파국은 피하되 그 과정에서 분출될 반미 기류를 대북지원 동력원으로 활용하려 들지 않을까. 정권이 승부처로 상정한 남북관계에서 무력해지면 레임덕이 온다. 그러느니 모험을 감행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르면 다음달 시작될 11차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 분수령이 될 것 같다. 때마침 트럼프가 동맹국들에 `주둔비용+50%`를 요구할 생각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올해 800억원을 인상하는 데도 그렇게 진통을 겪었다. 2조원을 더 내라고 하면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 정부 86(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인사들은 왕년에 `한 반미` 해봤던 사람들이다. 대중이 어느 대목에서 미국에 반발심을 느끼고 어느 지점에서 민족 감정으로 불타오를지 전문가적 감각을 가지고 있다. 운이 좋다면 이 전략은 성공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이성은 한국이 반미 국가가 되는 상황을 걱정한다. 트럼프의 장삿속은 `부자나라` 한국에 가능한 한 많은 비용청구서를 들이밀고 싶어한다. 이성과 장삿속, 그리고 비핵화 셈법을 절충한 결과로 어느 정도의 북한 지원을 눈감아 줄지도 모른다. 한국이 아주 많은 돈을 내는 조건으로.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얻을 것은?

이건 그저 비관적 상상일 뿐이다. 하노이에서 트럼프는 그가 김정은에게 값싼 양보를 하리란 세상의 비관론을 일거에 잠재웠다. 많은 한국인들이 트럼프에 일희일비한다. 국내 정치에 비관적 상상을 하고 트럼프라도 바른 판단을 해 주길 바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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