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익 / 한양대 특훈교수·前 한국전력 사장

한반도는 동북아시아 끝자락에서 대륙을 지고 있고 대양을 안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대륙의 기상과 대양의 넉넉함을 동시에 담은 기질과 품성을 갖춘 민족이 한민족이다. 그렇지만 대양 쪽으로는 일본열도가 빗장처럼 가로막고 있어 근대사에서 우리 민족이 밖으로 뻗어 나갈 방향은 북방, 즉 러시아와 중국밖에 없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을 이기지 못하고 탈출하다시피 남부여대해서 흘러 들어간 곳이 그곳이다.

중국 동북3성 특히 옌볜 지역,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모여 살며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중국인들이 버린 척박한 땅에 논농사를 지었다. 손재주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고려인들은 러시아에서 수공업과 농업을 영위하며 사회 각 분야에 진출했다. 그리고 빼앗긴 조국을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됐다. 그러나 일제 후반기 중국과 러시아의 한인들은 처참한 시련을 비슷한 시기에 겪는다.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인을 불령선인으로 몰아 그들을 대륙 침공의 배후 위협세력으로 간주해 잔혹하게 학살했고, 러시아 쪽에서는 1937년 스탈린의 이민족 분리정책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다 버리고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쫓겨나가게 됐다.

고려인 15만명 이상이 시베리아 열차에 짐짝같이 실려 40일간 중앙아시아로 향하고 수송 도중에 2만명 정도 사망했다. 살아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이들은 초기에 짐도 없이 톈산산맥 기슭에서 토굴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들은 생명력을 발휘해 30~40년 후에는 대형 집단농장을 일구거나 대형 야금단지의 대표가 되기도 했고 정부 고위직도 나왔다.

그 후 소련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과의 교류는 끊어졌지만, 그들은 혈통, 언어, 관습을 보존하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지켜왔다. 중국의 조선인들도 옌볜 자치구 등을 성사시키면서 정치적으로 소수민족의 입지를 구축해나갔다. 또 중국과 러시아가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설 때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 이들 국가와 빨리 수교했고 일본이 진출 위험 부담을 계산할 때 우리 기업은 기동력을 발휘해 그 시장에 뛰어들었다.

중국과 러시아에 장기적 진출 기반을 만들기 위해 중국 헤이룽장성에 1억평이 넘는 황무지를 개척해 농지화하는 삼강평원 옥토화 사업, 러시아 연해주에 산업단지와 주택단지를 건설해 신도시를 건설하려는 사업도 정부와 개척자 정신을 가진 기업가 몇몇을 중심으로 추진한 바 있다. 특히 연해주 신도시 구상은 1990년대 초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대부분 회교 국가로 전환하고 소수민족인 고려인들이 또 새로운 적응의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나왔다. 많은 사람이 50년 전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했고 일부는 실제로 돌아가게 된다. 여기에 장치혁 전 고려합섬 회장 같은 기업인들이 뜻을 모으고 정부도 참여해 이들이 안착하고 한·러 협력을 위해 야심 차게 산업단지를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일부 한국 기업인은 고려인들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 면화나 섬유 등에 투자사업과 기술지원사업도 벌였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과 한국은 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필자는 당시 연해주 산업단지 조성과 중앙아시아 지역 투자사업 조사를 위해 누비고 다녔던 산증인이기에 이러한 사업들이 그 후 정부가 몇 번 바뀌면서 잘 이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달 문재인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3국 방문과 현지의 독립유공자 시상은 특별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북방정책의 연장이라 했다. 특히 안산과 광주(光州)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모여 사는 고려인들에게 큰 기대와 자부심을 줬을 것이다.

현 정부의 신북방정책이 처음 같지 않은 듯하다. 이들 지역에 대한 각종 투자와 협력사업이 다시 탄력을 받기 바라며, 특히 한·중·러·일을 연결하는 동북아 전력망 건설사업이 조속히 개시되기를 기대한다. 어마어마한 경제적 효과도 있지만, 동북아 전력망의 중심에 있는 한국의 북방을 향한 민족적 혼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같은 민족인 중국의 조선인,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오랜 어려운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겸손해야 하고 이들에 대해 온정과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