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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귀환, 재점화된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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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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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길 / 선임기자

미-중-러 관계의 긴장 격화로 러시아가 한반도로 귀환해 한반도에서의 전통적인 그레이트 게임이 재점화됐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열강과의 다변적인 관계정상화를 통해 권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민족끼리’나 ‘한-미 동맹’만으로는 안 된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5일 오후(현지시각)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 극동연방대학에서 단독회담과 확대회담을 마친 뒤 만찬을 시작하며 건배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타스 연합뉴스

근대 이후 한반도에 대해 주변 4대 열강 중 러시아는 가장 진폭이 큰 개입을 보여왔다. 한반도 분단을 낳은 최대 동인이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뒷짐을 진 채 가장 물러서 있었다. 국력의 부침에 따른 것이기는 하나, 미국·중국·일본에 비해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이해가 자신들의 세계 전략에서 종속적 변수였기 때문이다.

   
▲ 정의길 선임기자 

러시아에 최대 지정학적 이해는 동유럽에 있고, 동아시아는 그 종속변수의 성격이 짙었다. 하지만 한반도를 향한 러시아의 진퇴는 한반도 긴장과 극적인 정세 변화의 바로미터이자 최대 변수였다. 일본이 한반도에 가장 적극적으로 진출한 동인도 러시아의 남하 저지였다. 이 때문에 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남하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막으려는 영국 사이에서 벌어진 19세기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 회전장이 됐다. 영국과 미국 등 서방 해양세력이 일본을 내세워 러시아를 패퇴시킨 러-일 전쟁이다.

러시아는 2차대전을 거치면서 소련으로 부활해 한반도에 진주했다. 당시 소련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수도 있었으나, 38선에서 멈춘 것은 동유럽 문제에서 미국 등 서방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북한을 동유럽 국가들처럼 위성국가로 만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북한을 동아시아에서 자생변수로 둬서 미·중·일과의 관계에서 카드로 활용하여 왔다. 한국전쟁부터 소련의 한반도 개입은 언제나 미국이나 중국을 견제하거나 화해하는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냉전 시대에 중-소 등거리 외교라는 공간을 열었고, 북한의 ‘자주 노선’을 강화하는 한 기반이 됐다.

북한이 미국의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1968년은 린든 존슨 미 행정부가 동유럽 국가들에 경제적 지원을 제시하며 탈소련을 부추기고, 베트남전이 확전 일로로 갈 때였다. 소련은 미국의 중재 요청을 거부했고, 유엔에서도 북한을 제재하는 결의안에 거부권 행사를 했다.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는 동아시아의 긴장을 극적으로 고조시키며, 동유럽과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에 발목을 잡았다. 미국은 북한과 직접 협상을 통해 북한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미국 등과의 관계가 순탄할 때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이나 북한과의 관계는 저하됐다. 1980년대 중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소련이 대미관계를 개선하고 개혁개방에 나설 때나,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되어 미국의 ‘푸들’이 됐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시절에 조-러 관계는 바닥을 쳤다. 북한은 러시아라는 자신들의 자주외교의 한 공간이 없어지자 핵개발로 나섰다.

러시아의 부활을 내건 블라디미르 푸틴 이후 조-러 관계는 회복되기 시작했고, 2000년에 러시아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3번이나 러시아를 방문했다. 러시아와 미국의 갈등에 불을 지른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거론된다. 크게 보면 한반도 역시 그 자장에 들어갔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일본과도 북방영토를 고리로 협상을 지속한다. 북한은 김정은 등장 이후 미국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두 차례나 하고, 중국과도 3차례 정상회담을 이어갔다. 2015년부터 예고됐던 푸틴과의 정상회담도 지난 4월에 수행했다.

김정은-푸틴 정상회담 뒤인 지난 3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김정은과의 조건없는 정상회담 의지를 밝혔다. 다음날 북한은 ‘전술 유도 무기’라는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일본과 미국은 ‘단거리 발사체’라고, 과거와는 달리 북한에 대한 비난을 극도로 자제하며 적극적인 대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는 그저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진전이 막히자 벼랑 끝 ‘떼쓰기’를 반복하는 것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미-중-러 관계에서 긴장 격화로 러시아가 한반도로 귀환해 한반도에서의 전통적인 그레이트 게임이 재점화되고, 북한은 그 특유의 등거리외교라는 ‘자주외교’의 공간을 다시 확보하는 것인가?

조선이 개항한 강화도조약에서 일본 대표였던 이노우에 가오루는 일본을 찾은 수신사 김기수에게 “북쪽에 한 물건이 있는데 그 세력이 심히 맹렬하다”며 “독립 방법을 세우고 동맹을 많이 체결해서 세계 내의 권형(세력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러시아에 맞서는 조-일 협력을 강조한 말이나, 한반도의 세력균형 중요성은 지금 더 유효하다.

‘사방에서 한반도를 향한 세력들이 맹렬하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주변 열강들과의 다변적인 관계정상화를 통해 권형을 유지해야 한다.’ ‘우리 민족끼리’나 ‘한-미 동맹’만으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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