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19.5.17 금 17:15
재외선거, 의료보험
> 오피니언 > 교포지논단
사랑을 권유합니다
동북아신문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5.09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정련 / 칼럼니스트

   
 

사회생활을 위한 자발적인 선택이든, 유전자가 내려준 타고난 성향이든, 나는 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듣는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활 곳곳에서 참말로 다른 모습으로 발현된다. 물론, 감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참 필요 이상으로 감정 이입을 하고 몰입하고 함께 울고 웃는다. 그럼에도 이성적이라고 보여지는 이유가 뭘까.

최근에 친한 동료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본인이 평소의 나의 생각을 많이 알고 있고, 나의 선호를 많이 알고 있고, 성격 급하고 추진력(좋게 말하면, 밀어붙이기를 잘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이 있다고 생각 했으나, “정말 잘 참더라. “라고 했다.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문뜩, 이래서 “일”이라는 분야에서 이성적이라는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었다. 화를 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다른 생각을 주입해 봤자 시간 낭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해결은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틈으로 치고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결과다.

하기 싫어서 발뺌하는 사람은 항상 있고, 여럿이 모여서 회의를 하면서도, 정작 해결책에 관심 없이 문제점만 흥분해서 널어놓는 사람은 아주 흔하게 있다. 나는 머릿속으로 다른 계획을 하고 있을 지언정 화를 내거나 중단시키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이런 모습을 “잘 참는다”라고 얘기 했을 것 같다.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아닌지만 명확하면, “내버려둬”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 치여 살면서 이런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성적이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소리 한번 확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을 수도 없이 억누르며 진이 빠지고 무기력해진다. 어떤 행동이 옳은 건지 가치관처럼 바닥에 묻어놓고 그 위에 뭔가를 쌓아가는 것이란 원래가 이런 일인 것 같다.

뜬금없이 사랑이야기는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모두가 이성적이라는 평을 받지 않을 지언정, 우리는 크고 작은 눈앞의 목표를 바라보기 바쁘게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누구도 직장에서의 일 하나, 승진 한번, 아이의 시험성적 한번, 이런 것들을 인생의 목표라고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살지 않는다.

나만 해도, 이성을 지켜내는 것은 내 눈앞의 한 가지 일을 해결하기 위한 수동적인 사회 순응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사랑”이란, 터무니없는 설렘이란, 나를 멍청하도록 허락하고 잠시 딴 짓에 푹 빠져 살더라도 만취보다 더 정신 차리지 못하는 그런 숨구멍 같은 유일한 감정일 것이다.

결혼을 참 일찍 하다 보니 다양한 연애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을 요즘 세삼 느낀다. 내 주변에 사람들은 나에게 늘 결혼과 육아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결혼과 육아 또한 이성의 뿌리를 떠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나에게 조언을 받을 점이 있다는 것 또한 이런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편과 시댁과의 갈등, 아이가 참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남들은 뭘 하는데 나도 안하면 안 될 것 같고, 이러한 수많은 생활의 고충들이 나에게 찾아온다.

작년 이맘쯤인가, 건강한 가족관계를 주제로 짤막한 비공식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이렇게 세 가지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1. 남편을 남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라. 우리는 친구에게 내가 오늘 아프니까 니가 눈치껏 나의 표정으로 나의 불편함을 캐치하고, 배려하는 메뉴와 일정을 만들 것을 기대하는가? 그렇게 기대한다면 그건 남편이 이겨내야 할 몫이지만, 대부분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편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가족을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편한 사람”으로 잘못 생각하고 이런 것이 많은 관계를 망친다. 친구에게 하는 나만의 매너와 최선을, 반만 해도 아주 건강한 관계의 기반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2. 0세부터100세까지 “존중”하라. 우리 아이는 “어려서” 판단을 하면 안 되고, 우리 부모님은 “요즘”을 모르셔서 판단을 하면 안 된다고 함부로 넘겨짚지 않았던가. 경청이란, 듣고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그의 판단을 믿어보는 것이다. 조카가 코끼리 그림을 보고, “하마다”라고 하니, 엄마는 순간, “얘, 이건 하마가 아니라, 코끼리야”라고 정답을 가르쳐줄 의무감을 불끈 느끼며 개입한다. “하마로 보일 수 있구나, “라고 넘어가면, 언젠가 이 아이는 아, 그건 하마가 아니라 코끼리였구나 라고 아무 상관없이 터득하게 될 것이다. 엄마가 정답을 알려주려고 개입하는 순간, 이 아이는 “내가 틀린 말을 했구나”라는 감정과 함께 아이로서는 가져서는 안 되는 “말조심”의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어른이 어린이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어휘나 동물의 종류가 아니라,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존중하는 것, 수두룩한 다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엄마는 괜찮아”는 모든 잘못된 관계의 시작이다. 연로하신 어머님들은 참 뼛속까지 콕콕 찌르는 상처 주는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신다. 나의 눈에 그들은 막 세 살이 되어서 엄마의 관심을 받아보려고 사고치는 아이들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아들이 엄마의 말에, “엄마는 또 그런 소리를 뭣 하러 해”라는 대꾸를 하는 것이 전혀 희한하지 않은 일이고, 심지어, 이런 대꾸라도 해주는 것이 어디야 라고 느끼는 만큼, “엄마”들은 그렇게 살아오셨다. 어머님께서 팔순이 넘으셨지만, 여전히 한해 이상 같은 옷을 입지 않으시고 머리를 항상 곱게 손질하신다. 남편에게 어머님 만났을 때, “우리 엄마 머리 하셨네, “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뭔가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고, 뭔가 해결한다는 것은, 내 기준에서의 “성과”와 “발전”, 좋은 가족관계 등을 과실로 누리게 되겠지만, 나의 감정과 시간은 “소모”라는 현실을 벗어나기 어렵다.

이 대목에서 웃긴 것은, 육아와 살림과 이러한 조언을 나한테 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결혼과 사랑이라는 것을 곁들어 질문하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모양이여서 그런지 주변에 참 이런 사람들이 많다. 목표 지향적이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무엇인지 규정지어 본인은 “좋은 것”을 추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개똥철학에 똘똘 뭉친,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일과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지쳐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잘 풀어가려고 노력하고, 불만을 한번 털어놓더라도 “더 나아지기 위한”, 내가 더 마음 편하게 잘 할 수 있기 위한 계산된 불만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성의 끈을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가 필요하다고. 사람을 바라보거나 눈앞에 현실을 바라볼 때 “이성적”이지 않고 “좋을 대로”, “될 대로” 바라보는 것 또한 고난이도의 선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사랑을 권장하고 싶다.

나에게 닥쳤던 설렘의 나날들이 그리워 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나의 삶에 숨을 쉴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줘 서가 아니라, 숨 막히는 하루하루의 숨구멍으로 찾고 싶어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사랑이라는 순진한 설렘은 언제 어떻게 찾아오든, 나에게 멍청해 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허락하는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설렘에서 오는 상상, 평소에 절대 할 수 없는 멍청한 이야기와 멍청한 행동들, 이런 것들이 “이성”으로부터 나를 숨 쉬게 하고 긴장을 내려놓은 그냥 “나”를 세상으로부터 독립시켜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설사 일상이 남의 기준에서 덜 “이성”적이더라도, 본인 기준에서는 현재 처한 상황을 잘 이겨내기 위한 최선의 “이성”적인 노력을 하고 있을 터이니.

결혼적령기에 들어서면, “연애”마저도 목적의식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한두 명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들으면서, 내 나이에 대한 생각을 처음 바꿔 보았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지금 이 나이였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참 상상이 되지는 않는다. 최소한 결혼이라는 것이 나에게 “설렘”을 빼앗지도 않았고, 나의 그 어떤 “목표”와 “꿈”도 빼앗지 않았다고 지금은 믿고 있으니.

다만, 결혼을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가 조언 해주셨던, 사람과 사람은 평생 설렘으로 살지 못하고 언젠가는 좋아하는 그 어떠한 점 때문에 끊임없이 보여지는 “새로운” 점들을 이겨내기 위하여 스스로를 설득하고 사는 그런 것, 그런 것이 결혼이라고 하셨다.

잘 모르겠으나, 나를 멍청하게 만드는 그런 연애를,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는 사랑과 결혼으로는 결혼 후에 이어가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단순하게 해 본다면, 의식적으로라도, “새 사람”과 “새 사랑”에 의하여 설레는, 정신 줄을 놓고 멍청해지는 그런 사랑을 지금이라도 서둘러서 많이 했으면 한다.

시간이 지나 되돌아보는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을. 숨을 쉬고, 울고 웃고 늙어질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을 불지를 그런 것이, “나”인 것을.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무엇으로 해석된 들 또 어떠할까.

다이어트 하는 여자들의 가장 큰 후회는 “그때 덜 먹고 참고 운동했을 것을”이 아니라, “그냥 그때 체중이라도 유지했을 것을…”이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전체기사의견(0)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회사소개광고문의기사제보구독신청찾아오시는길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 110-888 서울시 종로구 종로 19 B동 1118호 (종로1가, 르메이에르종로타운) | Tel 02)2075-7141~3 | Fax 02)2075-7144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 01003 | 등록일자 : 2009. 10. 24 | 발행인 : 이구홍(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개인정보취급담당자 : 최유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유정
Copyright 2008 세계한인신문. All Rights Reserved.mail to oktime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