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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의 도쿄, 2019년의 도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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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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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 / 논설위원

한국 뺀 미·일 밀착 위험 / 정부 외교력 부재는 심각 / 외교기밀 고발전 할 땐가

   
 

‘레이와(令和,일본의 새 연호)’로 새 시대를 연 일본 열도는 활력이 넘쳤다. 다시 살아난 건 경제만이 아니다. 세계의 이목을 끄는 아베 총리의 현란한 외교술은 움츠러들었던 국민들의 어깨에 신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3박 4일 국빈 방문에 이어 이달 말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 그리고 2020 도쿄 올림픽….

도쿄에서 사흘 밤을 보낸 트럼프 대통령의 이례적인 행보는 ‘잃어버린 20년’으로 무너졌던 이 나라 국민의 자긍심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아베 총리와 골프→스모 경기 관람→나루히토 일왕 부부와 황궁 만찬→정상회담→해상자위대 기지 방문은 질적으로 달라진 미·일 관계를 함축한다. 한 지한파 인사는 “시대가 바뀌었고, 동시에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일본 국민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시절을 포함해 아베 총리와 모두 11차례, 25시간 45분간 만났다며 두 정상의 밀착상을 보도했다.

한국이 배제된 미·일 유착은 위험 징후다. 지난 역사가 그걸 보여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100여년 전, 한국은 ‘국제 고아’ 였다. 일본은 고도의 외교술로 중국·미국·영국·러시아를 능수능란하게 요리해 한반도에서 하나씩 손을 떼게 만들었다. 한국을 국제 사회의 외톨이로 만들어 강대국의 외교적 개입을 봉쇄한 것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결정판이다. 1905년 7월,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필리핀으로 가던 태프트(전쟁부장관)는 도쿄에 들러 가쓰라(내각총리대신)와 밀담을 나눈다. 공식 외교문서도, 협정도 아닌 비밀 대화에 불과하지만 한반도 식민통치의 단초가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도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한다.’

훗날 미국 역사학자 타일러가 발견해 세상에 알리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역사 속 미제로 남을 수도 있었던 비밀 대화록, 그 내용이 기막히다. 일본의 러시아 침략에 우려를 표명한 태프트에게 가쓰라는 이렇게 말한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려면 대한제국이 러시아 같은 외세를 끌어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 것은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이지 (미국 지배하에 있던) 필리핀을 치기 위한 게 아니다.” 미국을 안심시킨 가쓰라는 영국(8월, 제2차 영·일동맹), 러시아(9월, 포츠머스 조약)와 잇따라 조약을 맺어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확보한다. 그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고, 5년 후 1910년 8월 29일엔 주권을 완전히 박탈한다. 총 한번 쏘지 않고 한반도를 삼켜버린 것이다. ‘외교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비유가 꼭 들어맞는 경우다.

도쿄에서 바라본 한국 외교는 실망스럽다. 우려를 넘어 위험수위로 치닫는 것 같아 뒷골이 서늘해진다. 55년 전통 우방국인 한국은 도쿄에 나흘이나 머물렀던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끝내 성사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트럼프는 ‘조건 없이 김정은과 만나고 싶다’는 아베를 지원하고 일본을 아시아 정책의 핵심축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항공모함으로 개조 가능한 이즈모급 호위함 ‘가가’에 함선해 미·일 동맹의 견고함을 과시했다.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에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인도·태평양 전략’ 강화 차원에서 미·일·인도 간 3자 정상회담을 갖겠다고 했지만, 한·일 정상회담에 대해선 확답을 하지 않고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 역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도쿄에서 만난 인사들은 한결같이 한국을 법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로 깎아내렸다. “할 수만 있다면 한국과 아예 거래하지 않고 살 수 없는가 하는 게 요즘 일본 사람들의 솔직한 심정”이라는 일본 기자의 말이 폐부를 찌른다.

정부는 묵묵부답이다. 국제사회의 불신이 깊어지고 있는데도 태평스럽다. 정부가 소극적이면 집권 여당이라도 앞장설 법한데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용기 있는 정치인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판은 외교 기밀누설을 둘러싸고 여야 간 맞고소·고발전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여야를 떠나 국익을 위해 지혜를 짜내자는 제안도, 논쟁도 증발해 버렸다. 지일파(知日派)를 자처했던 정치인들조차 어찌 된 일인지 입을 닫고 있다.

110년 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대한제국은 ‘강요된 고립’으로 나라를 잃었다. 하지만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중견 국가 대한민국이 고립무원의 신세를 자초하고 있는 건 무슨 까닭인가. 이국땅에서 느끼는 외교의 부재가 더없이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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