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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보내며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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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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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 사회에디터

   
 

몇 년 만에 고향에 온 손자를 보며 여든 넘은 할아버지는 한숨부터 쉬었다. “사람들한테 듣자하니 네가 들어간 대학이 좋은 학교라고 하더구나. 보통 때 같으면 네가 출세하기를 바랄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어지러운 것 같으니 그저 무사하기만 했으면 좋겠구나.”

1987년 여름방학 때였다. 박종철·이한열의 죽음을 보고, 6월 민주항쟁을 겪은 뒤 고향에 갔다. 평생 농사만 지은 시골 촌로인 할아버지에게도 도시의 어지러운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6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할아버지에게 속마음을 들은 것은 그때가 유일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전쟁으로 아들 둘을 잃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에 간 큰아들은 타고 가던 배가 미군의 공습에 침몰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은 6·25전쟁 때 전사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바람은 후손의 무사함뿐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가끔 나에게 얘기했다. “네 할머니가 불쌍하다. 생때같던 자식을 둘이나 잃었으니 가슴이 얼마나 미어지겠느냐.”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할머니의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며칠 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큰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큰아버지를 설명하는 묘비의 문구는 짧았다. ‘1953년 2월15일 연천지구에서 전사.’ 아버지는 1952년 여름방학 때 큰아버지를 한 번 봤다고 한다. 휴가를 얻어 고향에 온 큰아버지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버지에게 “전쟁이 끝나면 서울에 가서 살자”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큰아버지는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물을 조금 넘긴 나이에 전장에서 산화했다. 올해도 현충일을 맞아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에서 희생된 가족들의 못 이룬 꿈을 안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을 것이다. 곁에 있는 가족들의 무사함을 빌면서.

소설가 한강은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에 ‘미국이 전쟁에 대해서 말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보냈다. 가족을 잃어본 한국인들의 아픔을 알아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그는 미국 뉴스에서 들려오는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매일 2만명의 한국인이 죽게 될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전쟁이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에서만 벌어질 것이다”라는 말들에 한국이 몸서리치고 있다고 했다. 한국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뿐이라고 했다.

한국인들이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은 여론조사기관들의 대통령 지지율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년을 맞은 지난해 5월 초 갤럽 조사에서 지지율은 83%에 달했다. 4·27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이 컸다. 긍정 평가 요인으로 ‘남북정상회담’(35%), ‘북한과의 대화 재개’(14%), ‘대북정책·안보’(9%), ‘외교 잘함’(8%) 등 남북정상회담 관련 요인이 절반 넘게 꼽혔다.

반대로 2차 북·미 정상회담 직후인 올해 3월 리얼미터 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44.9%까지 떨어졌다. 다른 요인들도 있었지만 북·미 정상회담 합의 결렬 이후 비핵화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혔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기대감이 한국인들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로 나는 해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사과가 없는데 어떻게 평화를 말하느냐”고. 하지만 전쟁은 해결책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은 전국에서 6·25전쟁 때 학살된 민간인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북한군이 아니라 치안대 등 한국의 준군사 조직에 의한 희생자들이다. 노근리에서는 미군이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북한에서도 이런 일은 있었을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처럼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 남았는지만을 결정할 뿐이다(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only who is left)’. 그래서 손자병법도 전쟁에 의한 해결보다는 외교에 의한 해결을 높은 수로 평가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전방부대를 방문해 “군과 정부의 입장은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 부대 병사들의 부모는 이 말을 전해듣고 한강의 말처럼 몸서리쳤을 것이다. 자식들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돼서. 며칠 전 현충원에서 묘역정화를 하는 나경원 원내대표의 모습을 보면서 묘소 주인의 가족들을 생각하고 있기를 바랐다.

평화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 모든 국민이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는 싸우더라도, 한반도에 평화를 이루는 일에서만큼은 하나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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