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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출범해 27년간 유지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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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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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1911년 신해혁명 무창봉기 양시아전투 때의 혁명군.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s)는 새로 국가를 수립하거나 이전의 국가가 붕괴 후 일정 기간 동안 정치적 전환을 관리하기 위해 수립된 비상정부이다. 임시정부는 여러 형태가 있다.

첫째, 옛 정권이 무너지고 다른 세력이 권력을 차지한 혁명적 임시정부이다. 쑨원(孫文) 등이 1912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중화민국 임시정부, 레닌의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차르(황제) 체제의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세운 러시아 임시정부가 그런 경우이다. 둘째는 권력공유 임시정부로 이전 정권과 후속 권련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경우이다. 셋째는 현(임) 임시정부로서 권력 교체기에 권력이 전 정권에 속하는 경우이다. 넷째는 국제임시정부로서, 권력 전환기에 권력이 국제사회에 속하는 경우이다.

임시정부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1776년 미국 동부의 13개 주가 식민지 모국인 영국에 대해 독립선언을 하고 독립전쟁을 치르며 건국한 후 1789년 미국 의회가 구성되어 승계할 때까지 존속한 대륙의회(continental congress)도 미국의 임시정부였다. 호주도 1901년 영국에서 독립한 후 영국 연방과의 관계를 설정할 때까지 관리정부로 있었다. 우리도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1919년 3.1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에 비하여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 GiE)는 전쟁, 내전, 혁명, 또는 군사 쿠데타 등으로 권력자 또는 권력집단이 다른 나라나 자기 영토 밖에 있으면서 언젠가는 본국 권력을 되찾고자 하는 권력집단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독일 점령지 등에서 16개 정부들이 영국 런던에서 둥지를 틀고 있었다. 대개 망명정부는 침략, 지배정부의 불법성에 대한 광범한 믿음으로 지탱된다. 우리 독립운동 기간에 고종이 국외로 탈출하여 정부를 세웠다면 망명정부가 되었을 것이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황제가 포기한 주권은 국민의 것

우리 근대사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의 쟁취라는 과제와 근대적인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이중과제를 안고 있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왕권을 교체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혁명사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의회설립운동 때 그 운동이 공화주의 운동이라고 모함을 받고, 탄압받기도 했으나 공화주의를 표방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황제가 살아 있는 권력으로서 존재했고, 왕과 백성에게 공동의 적인 일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905년 소위 을사조약이 강요되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5개월 뒤인 1906년 4월 18일 새벽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다. 약 3000명이 사망하고 22만 5000명의 이재민이 생긴 큰 피해였다. 다행히 한국인의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불과 2주전 발족한 공립협회 건물이 파괴되었다. 우선 임시로 공립협회와 공립신보 사무실, 한인 40여명 거처를 샌프란시스코만 건너편 오클랜드로 옮겼다. 이 공립협회는 1903년 9월 안창호(安昌浩)·박선겸(朴善謙)·이대위(李大爲)·김성무(金聖武) 등이 상호 친목을 목적으로 결성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로 출발한 단체였다. 하와이로 이민했던 노동자 중 일부가 미국 본토로 이주해 옴에 따라 회원이 늘어나자 친목회를 확대 개편하여 공립협회(共立協會, 1905.4.5)를 창립했다. 서로 도와 함께 일어선다는 이름이었다. 기관지 ‘공립신보’도 발간했다. ‘공립신보’에다 나라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 사상과 권력은 입법, 행정, 사법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권력분립 등 공화제 등을 소개했다.

그 6개월 전인 1905년 11월 17일 조국에서는 일본에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당하여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이 실질적으로 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때 대지진이 나자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관은 일본 통감부에 “지진으로 한인 24명 사망하고 부상자가 80명”이라는 허위보고를 하였다. 통감부는 이 보고를 근거로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1900달러를 받아 샌프란시스코 일본영사관으로 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서 일본이 한국정부를 대신하여 해외한인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면서, 해외 한인들도 보호조약을 인정하게 만들려는 계략이었다.

   
▲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앞줄 왼쪽에서 첫번째)

공립협회는 전체 회의를 열었다. 전체 의사로 일본 영사관을 통해 오는 돈을 받지 않기로 결의했다. 미주 동포들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기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왔기 때문에 일본이 빼앗은 외교권의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일본의 간섭을 거부했다. 교민들에 대해서도 공립협회가 독자적으로 교민을 보호하기로 했다. 또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운명을 다했으며, 황제가 포기한 주권은 국민들에게 이양된다고 하는 국민주권론을 정립한다.


1907년 1월 도산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원대한 계획을 갖고 국내로 들어와 신민회 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단체에 의한 새로운 국민을 준비시킨다고 표방하고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교육 혁신모델을 세우고, 전국에 신지식과 애국사상을 교육하는 학교설립운동을 벌였으며, 태극서관·마산동자기회사 등 민족기업을 일으켰다. 도산은 미국에서 민주주의 나라를 체험했다. 공화제를 포함한 문명적 가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실질적인 교육과 개개인의 경제적 자립, 국가와 사회공동체를 위해 납세 등의 개인의 의무를 철저히 가르쳤다. 새로운 공화국을 만드는 밑작업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미주동포 사회에는 “황제가 잃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론’이 본격 대두됐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구한국 멸망은 곧 (국민주권의) 신한국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임시정부 건설론이 본격 제기됐다. 박용만은 무형국가론(1911)을 제기했고, 미주 한인들은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 등을 통합해 해외 한인 최고 기관이자 임시정부 격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했다(1912. 11). 대한인국민회는 만주와 시베리아, 미주 및 하와이에 지방총회, 멕시코 등지에 지방회를 두고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성해 동포를 보호하며 독립운동을 조직화했다.

   
▲ 1937년 중일전쟁 때 상해시민들이 프랑스 조계로 피난하려고 몰려드는 광경.

공화제는 세계사적 대세

그 시기 청국에서는 쑨원(孫文) 등이 주도하여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청나라의 황제체제가 무너지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며 헌법격인 중화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신규식 등은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깊숙이 관여했다. 임시정부를 세우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3.1운동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헌장을 제정한 모델이 중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에 대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민주국가가 대결 구도로 되어 갔다. 대전은 민주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의 와중에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차르체제 또한 붕괴됐다. 혁명 볼셰비키는 러시아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이와 같은 내외적 대변화에 부응해 신규식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1917)’을 제기했다. 이 선언은 1910년 순종의 주권 포기는 곧 국민에 대한 주권양여로 보고, 재외 동포가 민족대회의를 개최해 최고 기관 즉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내용이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패전국 독일에는 바이마르공화국이, 오스트리아에는 제1차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터키에도 공화국이 수립됐다. 세계에 공화정의 시대가 본격 도래하고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때였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고종)가 승하했다. 고종의 서거는 조선과 대한제국 500년간 왕과 황제의 시대가 최종적으로 ‘사망’했음을 의미했다.

1919년 3월 1일 국장을 이틀 앞두고 국민들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범민족적인 3.1운동에 나섰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전 민족이 하나가 되어 일본의 총칼 앞에 두려움 없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자유와 독립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정부 수립이 선포됐다. 이들 모두 민주공화정을 표방함으로써 국민주권론과 공화정이라는 민족적 요구와 세계사적 시대변화를 반영하며 왕과 황제의 통치는 더 이상 미련으로 남아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임시정부의 출범과 통합

1919년 4월 10일 밤 10시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 위치한 2층 양옥에 독립운동가 29인이 모였다.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12시간 마라톤 회의에서 회의의 이름은 임시의정원으로,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국무총리와 각료를 임명해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예를 참고하여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공포했다. 이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이라 선포했다. 모든 국민은 계급, 신분, 남여의 성별, 교육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다는 평등권 등 국민의 권리와 교육, 근로 , 국방 등 국민의 의무에 대한 규정이 포함된 10개조의 건국 정신과 국가의 기본 원칙을 천명했다.

안창호는 그해 6월 28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미주 한인들이 모금한 돈으로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아름다운 2층 건물을 얻어 임시정부 청사로 삼았다. 안창호와 임시의정원 2대 의장인 손정도 목사가 정성을 다해 노력하여 9월 17일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다. 상하이에 해외 독립운동 세력들을 대표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것이다. 그 후 광복의 그날까지 27년간 우여곡절, 분열과 후퇴가 없지 않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유지되었으며, 일본이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국내륙 침략을 강행하자 김원봉의 조선혁명군 좌파 세력이 임시정부에 통합되어 들어오는 등 좌우를 아우르는 전민족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의 위상과 침을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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