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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나의 힘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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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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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철 /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원

   
 

역사적 현상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흔히 그 현상을 둘러싼 ‘구조’나 현상의 중심에 있는 주체의 ‘의지’를 살핀다. 예를 들어 19세기 조선왕조에서 농민반란의 폭발적 증가 이유를 세금제도 문란으로 인한 민생 파탄에서 찾는 것, 1차 세계대전 패배가 불러온 독일에 대한 과도한 전쟁 배상금 요구가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구조적 설명이다. 또 조선시대 세금제도 개혁인 대동법 성립에서는 잠곡 김육 등 개혁 주체의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이것은 개혁 성공의 요소로 의지를 강조하는 방식이다. 이런 설명을 들을 때 우리는 문제가 잘 설명되었다고 느낀다.

구조나 의지가 역사적 현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언제나 충분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서 심리적 요인 같은 것도 때로 중요하다. 경제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심리’를 이용해 경제현상을 설명했다. 경제학원론만 배워도 ‘기대’(expectation)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경제 행위자가 향후의 경제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기대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 경제주체의 경제적 행위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경제는 심리다”라는 가끔씩 등장하는 말은 이것을 가장 압축한 말이리라.

역사학에서 개인이나 집단의 감정이나 심리를 설명도구로 활용한 연구는 별로 없다. 한국사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구조’나 ‘의지’가 매우 객관적이고 안정적인 요인처럼 보이는 것에 비해서 감정은 그렇지 않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들마다 느끼는 정서가 다르고, 설령 같은 감정을 갖더라도 그 정도가 다르다. 그런 정서를 어떻게 계량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감정은 지속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그 감정이 역사적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현실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모두 역사적으로도 나타난다. 역사란 시간적으로 누적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적인 만큼이나 감성적이고, 그런 상태에서 행동할 때가 많다.

퇴계 이황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남명 조식의 으뜸 제자 최영경은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152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벼슬을 지냈지만, 그는 끝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괴팍할 정도로 유학의 원칙에 충실한 행동 때문에 조금씩 주변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30대 후반에 경남 진주에 살고 있던 조식을 찾아갔다. 그의 명성에 이끌렸던 것이다. 두 사람은 한 번의 만남에 서로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조식을 방문하던 최영경은 47살에 아예 진주로 이사를 갔다. 선조 8년, 조식이 사망한 직후였다. 진주로 옮기자마자 그는 스승에 대한 추모사업에 매진했다.

서울을 떠나 진주로 거처를 옮긴 후 최영경은 정치적으로 점점 더 강경해졌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일차적 원인이다. 선조 8년에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었다. 비록 정권은 서인이 쥐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파상적인 공세를 펼치던 쪽은 동인이었다. 서인은 이이, 정철, 박순 등을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다. 최영경은 재야에 있는 동인의 맹장이었다. 동인과 서인 사이에 갈등이 지속되면서 서로 간에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갈등에 대한 소문은 멀리까지 과장되게 전파되었다. 하지만 지방에 있는 최영경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그는 서인들에 대한 분노를 키워갔다.

그런데 최영경이 정치적으로 과격해지는 데에는 개인적인 일도 크게 작용했다. 진주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그의 외아들이 죽었다. 최영경은 선조 23년에 벌어진 정치적 파국인 기축옥사 때 옥에서 사망한다. 이때 취조를 받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자식을 잃은 지 지금 14년입니다. 그 후로부터 음식을 전폐하고 단지 술로 날을 보내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다른 사람의 증언으로도 확인된다. 그의 절친 정인홍은 최영경이 아들을 잃은 후로 서인들에 대한 미움이 규모를 달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규모를 달리했다’는 말은 엄청났다는 말이다.

서울에서 전해지는 당쟁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최영경은 극단적인 상상과 발언을 하곤 했다. 그는 당시 서인을 대표했던 박순과 정철의 목을 잘라서 길거리에 내건 뒤에야 정치가 바르게 될 것이라고 여러 번 말했고, 언젠가 자신이 정철에게 고문을 당하겠지만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정철이나 박순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만나려면 만날 수 있는 사이였다. 서울에 있을 때 그의 친구였던 성혼은 동시에 정철의 친구이기도 했다. 최영경의 미움은 몹시 이념적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그런 미움이 그의 삶을 지탱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최영경은 기축옥사로 옥에 수감되어 취조를 받았다. 동인 중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나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취조 중에 조금도 고문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오랜 건강 악화로 옥에서 사망한다. 그리고 그의 사망은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의 이념적 분노는 자신은 물론 조선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요즘 우리 현실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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