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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겨냥한 증오의 총구
미주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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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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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 고문

   
 

지난 토요일 오전 텍사스 주 엘파소, 백투스쿨 샤핑객들로 붐비던 월마트에서 22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당한 총기난사 현장에 긴급 출동한 경찰은 단 한 방의 총도 쏠 필요가 없었다. 범인이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후 “내가 총 쏜 사람”이라며 31년 베테랑 경찰도 한 번 본적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투항한 것이다.

600여마일 떨어진 집에서 차로 10시간 달려온 21세 백인청년 총격범이 체포 후 했다는 말은 표정보다 더 섬뜩했다 : “가능한 한 많은 멕시칸을 죽이려 했다.” 범행 20분 전 그가 백인우월주의 사이트에 올린 것으로 알려진 성명서도 범행 동기를 “히스패닉의 텍사스 침공에 대한 대응”이라고 밝히며 이민을 향한 증오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무차별 난사’가 아닌 히스패닉 이민을 겨냥한 선별적 총격이었다. 대책 없이 반복되는 미국의 대량살상 총기난사에 대한 국제사회 반응도 이점을 주목한다. 이해 불가한 총기범람에만 집중했던 세계 언론들이 엘파소 총격 후엔 증오를 부추기는 인종주의를 함께 조명하고 있다.

독일의 슈피겔은 소수의견으로 경시되어왔던 백인우월주의 광기가 “트위터, 폭스뉴스, 그리고 무엇보다 트럼프 덕분에 현실세계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면서 총기난사의 유혈사태를 ‘미국의 새로운 내전’으로 규정했고 스페인의 신문은 엘파소 총격을 “미국 현대사에서 히스패닉에 대한 최악의 인종 범죄”라고 지적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한다.

엘파소 총격에 78세 아버지를 잃은 한 히스패닉 가족은 채 슬퍼하기도 전에 ‘멕시칸 죽이기’가 범행동기였다는 보도를 듣고 “온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느냐”고 몸서리쳤다. “이제 라티노들은 등에 과녁을 붙이고 다니는 듯 느낄 것”이라고 이민2세 교육 컨설턴트 제이미 캐삽은 우려한다.

수많은 총기난사 사건들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공화당이 강조하기 원하는 정신질환과 폭력적 비디오게임도 일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신질환자 비율이 다른 선진국보다 특별히 높은 것도 아니고 비디오게임 중독은 일본과 한국이 미국보다 심할 것이다.

다른 나라와 다르게 엄청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총이다. 아무나 손쉽게 손에 넣어 어디에서나 쏠 수 있게 방치하고 있는 느슨한 총기법이다.

공격용 소총을 ‘합법적으로’ 구입했던 엘파소 총격범의 성명서도 백인우월주의를 지지하고 유색 이민을 비난하는 한편으로 “우리의 유럽 동지들에겐 그들의 나라를 괴롭히는 수백만 침공자들을 격퇴시키는데 필요한 총기권리가 없다”며 개탄하고 있다.

30여명 사망자를 낸 지난 주말 엘파소와 오하이오 데이턴의 잇달은 총기난사에 대응책 촉구가 다시 높아졌다. 6일 발표된 USA투데이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67%가 총기규제 강화를 지지한다. 대량살상 난사사건을 멈추게는 못해도 희생을 줄일 수 있는 것이 총기규제다.

전망은 밝지 않다. 온라인 판매와 총기쇼를 포함한 모든 총기 구입에 신원조회를 전면 확대하기 원하는 민주당과 정신질환 대책을 강조하는 공화당의 기본 입장 대결은 변한 게 없다.

민주당 하원이 금년 초 통과시킨 신원조회 전면 확대 등 2건의 총기규제 강화법안은 상원에서 발이 묶인 채 잠자고 있다. 상원이 여름휴회를 취소하고 하원안을 표결하라는 촉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이런 압력에 휘둘릴 공화당 상원대표 미치 매코널이 아니다.
이번 사건 발생 후 신원조회 강화를 지지하는 듯 했던 트럼프가 막상 대국민 연설에선 언급조차 안 했으니 매코널도, 다른 공화의원들도 움직일 필요를 안 느낀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은 트럼프가 5일 대국민 연설에서 지지한 ‘붉은 깃발법(red flag law)’이다. 위험인물의 총기 구입을 금지하고 소유 총기 압류를 허용하는 법으로, 민주당은 너무 약하다며 못마땅해 하지만 공화당이 적극 입법의지를 보이고 있다. 트럼프가 변심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통과된다면 20여년만에 가장 중요한 연방 총기규제 입법이 될 것이다.

총기 난사는 오바마, 부시, 클린턴 대통령 때도 지금 못지않았다. 그러나 그땐 백인우월주의가, 인종증오가, 요즘처럼 ‘당당하게’ 대놓고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의 대통령들 누구도 인종차별 막말을 쏟아 내거나 이민이 미국을 ‘침공’한다고 선동하지 않았다.

지난 5월 플로리다 유세 집회에서 트럼프가 또 이민 ‘침공’을 들먹이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라고 불평했을 때 한 청중이 “쏴버려라”고 외치자 수천명이 환호했다. 이들을 제지하기는커녕 함께 웃으며 농담으로 대꾸하던 대통령, 유색인종을 겨냥한 반이민 정책을 공공연히 선거 전략으로 내세우는 그가 이제 “미국은 한목소리로 인종주의와 편견, 백인우월주의를 비난해야 한다…증오는 미국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난사범의 총구가 이민자를 겨냥하는 ‘위기’의 시대다. 이 증오의 총격을 부추기는 인종주의자가 백악관은 물론 의회에도 발붙이지 못하도록, 막강한 전미총기협회(NRA)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용기 있는 정치인들이 총기규제 입법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투표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 이민자들에겐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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