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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천제(天祭)를 지내며…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기원중국이 추진한 백두산공정의 목표…지역 확보, 한민족 흔적 삭제
이일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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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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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 / 한국간도학회 회장]

   
 

이튿날 우리 일행은 다섯 시 반에 일어났다. 백두산 현명봉(천문봉)에 오르기 위해 등산로 입구로 갔다. 승용차로 20여 분 소용되는 가파르고 급커브가 많은 위험한 운행거리이다. 6시가 안되어 지프차 여러 대에 나누어 타고 현명봉(천문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여명의 순간이라 백두산 아래의 뭇 봉우리들과 수림지대가 나의 시야에 흐릿하게 나타났지만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현명봉 아래에 하차한 우리는 10여 분 가파른 산을 등산해서야 용왕담이라 불리는 천지(天池)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이용한 지프차의 요금이 한 사람당 30원 정도였다. 대학교수 봉급이 150원에서 200원이던 때였으니 매우 비싼 편이었다. 백두산의 운행 도로는 급경사로 매우 위험했지만 운전기사들은 매일 하는 일과라서 그런지 태연했다. 더구나 도로 공사를 한다고 파헤친 곳이 여러 군데이다. 실제 4년 후 중국 지방의 당원들이 탄 중형버스가 브레이크 파열로 인해 낭떠러지에 떨어져 1명이 살아남고 50여명이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는 현명봉(천문봉, 2670m)에 올라 준비한 제물을 놓고 유성규 박사의 초헌을 시작으로 백두산 등정고유문을 낭독하고 나서 일행 모두 백두산 신령님께 술 한 잔씩을 정성을 드려 올리면서 조국의 번영과 통일 및 일행의 행운을 빌었다. 더불어 기념사진도 찍었다. 아직 해가 구름에 가려진 이른 새벽의 천지 물은 짙푸른 검은색이다. 사방이 아직 완전히 어둠에서 깨어나지 못한 천지의 14개 봉우리 모습이 호수에 비친 탓인지 천지의 모습이 장엄하고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이른 천지의 짙푸른 모습이 더욱 우리 일행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북한 땅에 있는 백두산 최고봉인 황중봉(장군봉 2749.6m)이 의젓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차츰 주위가 밝아지니 천지의 진짜 모습이 나타났다. 일 년 중 270일이 구름과 안개로 천지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천지의 회오리바람과 용틀임 및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날씨로 인해 관광객들에겐 천지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아쉬움과 신비를 더해준다고 했다. 우리가 백두산을 올랐던 이틀 동안의 날씨는 너무나 쾌청했다. 하얀 부석(浮石) 두서너 개를 기념으로 호주머니에 넣었다.

2670미터의 천문봉은 본래 서명응이 지은 이름이 현명봉이다. 중국에서 천문봉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백두산 지명부터 저들 식으로 장백산으로 부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등소평이 1983년 백두산 현명봉(천문봉)에 오르고 난 후 백두산의 절경에 탄복하고 나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등소평이 이 때 장백산(長白山)과 천지(天池)라는 휘호를 남겼다. 강택민도 1995년 천문봉에 오르고 장백산(長白山) 글씨를 남겼다. 그리고 벡두산의 천지는 1962년 조중변계조약에 의거 북한과 중국이 반분했는데, 54.5%는 북한이, 45.5는 중국이 차지했다.

1989년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특집인 “백두산 대탐사” 기사에 의하면 중국동포학자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북한과 중국이 모두 이 산을 백두산으로 부르기로 합의했을 뿐 아니라 백두산이 있는 산맥은 종전처럼 장백산맥으로 부르기로 했으며, 일부 중국 자료에는 백두산으로 표기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90년대 말까지는 백두산 천지라는 지명이 중국지도에 사용됐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도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동북공정’을 공식화 후 우리 고대사의 왜곡이 노골화되었으며, 2006년 8월에 백두산공정에 착수했다.

중국이 비밀리에 추진한 백두산공정의 목표는 백두산 지역의 확보는 물론이고 백두산의 역사와 문화의 바탕에 내재된 한민족(韓民族) 흔적을 지우기 위한 사전 작업이다. 이는 한 ‧ 중 수교 후 우리나라 사람들의 백두산과 연변지역에 대한 빈번한 왕래와 중국동포들의 한국입국 선호 및 20만 명 이상의 탈북자로 인한 만주지역의 불안상황으로 말미암아 중국의 정책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개칭하고 백두산의 주봉인 황종봉(장군봉, 2749m) 대신에 신창봉(백운봉, 2691m)을 주봉으로 삼았으며, 황중봉은 천지 동쪽 최고봉으로 소개했다. 백두산의 주 역사무대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조선, 고려 등의 한민족(韓民族)의 무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고구려, 발해, 요, 금, 청 등 동북지역 고대 다민족 정권의 무대로 왜곡시켜, 백두산의 발상 민족이 한민족(韓民族)이 아닌 만주족(여진족)으로 주장했다.

중국은 백두산 주변 산기슭에 공항과 스키장, 철로, 외곽도로를 건설했으며, 2006년 9월 장춘의 동계아시안게임 성화를 백두산에서 채화했다. 심지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록을 획책했으며, ‘요하문명론’ 및 ‘장백산문화론’을 창안해 백두산은 물론 만주지역 일대가 중국의 영토 및 문화임을 전 세계에 홍보했다. 중국이 백두산을 굳이 장백산으로 부르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백두산 일대가 간도영유권 분쟁의 단초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중국동포들의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은 80년대부터 은밀히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동북공정’을 준비해왔고 2002년에 비로소 이를 공식화했다.

현명봉 정상에서 다시 내려다 본 백두산의 수림지대는 사방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비경을 만들고 있었다. 저기 수림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곳이 반만년 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활동하며 말달리던 곳이 아니던가. 백두산은 실제 2천만 년 전에 생성되어 16회의 화산 폭발과 빙하작용으로 인해 해발 1800미터의 현무암 고원지대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리고 2천종이 넘는 자연생물과 98종의 담수어가 백두산 일대에 서식한다니 과연 생태학 연구의 보고인 곳이다.

1979년 백두산을 답사한 옥스퍼드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생태학자인 ‘던컨 푸어’ 교수도 ‘백두산 답사기’에서 백두산의 원시림의 방대하면서도 울창한 신비스런 모습에 감탄하면서 열대지방을 제외하고 이와 같은 원시림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우리 일행이 다시 지프차를 타고 내려오니 곳곳에 도로 정비하느라 인부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음해 북경아시안게임 때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연내에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도로의 설계 및 측량은 우리 중국 동포들이 대부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전해주는 동포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아침을 먹고 백두폭포(비룡폭포), 소천지를 둘러보고, 노천온천탕을 하기로 했다, 비룡폭포로 불리는 백두폭포는 어제 천지를 오르면서 자세히 관찰했으며, 소천지는 별로 크지 않는 조그마한 호수였다. 노천온천은 82도의 고온으로 계란을 삶아 팔고 있었다. 온천탕은 서너 평이 될까 말까 하는 좁은 공간에 이십 여명이 탕 안에 들어가니 매우 불결한 상태로 변했다. 심지어 한족으로 보이는 남자는 수건을 갖고 들어와 몸을 이리저리 씻는 광경에 모두 놀라 괜히 들어왔다는 표정이었다.

우리 일행은 점심 식사 후 용정을 향해 출발했다. 다시 백두산 수림지대를 지나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문비나무, 전나무 등 침엽수림이 보였다가 하얀 분을 바른 모습의 자작나무 군이 나타났다. 이도백하 주변에는 미끈한 미인송들이 여전히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오는 도중 송강진에 정차 짧은 휴식을 취했는데 그만 일행 중의 한 명이 개에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송강진의 의사를 찾아 주사를 맞는 등 큰 곤욕을 치루고 난 후에야 다음 일정이 잡혀있는 용정을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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