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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젖은 이별의 강, 두만강을 마주하다국권 빼앗긴 후 항일 투쟁의 중심기지…도문강이라 불리기도
편집부  |  oktime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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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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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은 연길에 도착한 지 5일째다. 우리 일행은 두만강 가에 위치한 도문시를 방문하기 위해 출발했다. 도로 옆의 마을들은 기와를 이은 벽돌집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초가지붕도 보였다. 도로변에 새로 건축하는 모습도 보였다.

우리 일행은 고개 마루에서 휴식을 취했는데 앞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는데 알고 보니 연길에서 흐르는 포이합통하 물이 동간도 지역인 두도구, 화룡, 용정으로 흐르는 해란강에 합쳐진 강물이었다. 해란강은 두만강에 흘려 들어간다.

가곡 ‘선구자’는 윤해영의 작사와 조두남의 작곡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이 선구자의 배경이 용정과 해란강이며, 1933년 조두남이 21세 때 간도의 목단강에서 만들었다고 했다. 1960년대부터 애창된 곡으로 당시 항일투쟁하던 선구자의 기상을 잘 표현했다.

해란강(海蘭江)은 화룡시 증봉산 동북의 협곡에서 발원해 화룡시내를 경유해 장인하, 복동하, 육도하, 팔도하 등의 지류와 합류한 후 연길시 하룡촌에서 포이합도하와 합류해 흐르는 두만강의 지류다. 그 길이가 145km인 해란강은 화룡시의 평강평야와 용정시의 서전평야의 젖줄이었으며, 해란강 일대는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삶의 보금자리였다.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항일투쟁의 중심기지가 됐다. 두만강 건너 무산군의 사람들이 해란강의 중·상류 지역을 개척한 곳이 ‘무산간도’이다. 해란강 하류 지역은 회령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 ‘회령간도’이고, 종성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개척한 곳이 ‘종성간도’이다.

따라서 해란강은 이 지역으로 이주한 개척민의 애환이 깃든 강이었으며 ‘정착의 강’이었다. 항일투사들에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항일투쟁의 강’이기도 했다. 항일투쟁의 중심지 역할은 용정촌이었다. 1902년 간도시찰사로 임명받은 이범윤이 동간도에 진입해 위무하니 남녀 십 여 만 명이었다. 이범윤은 한인(韓人)의 보호를 위한 군대의 파병을 요청했지만 정부가 이를 불허하자 스스로 사포대를 조직했다.

당시 간도 한인(韓人)들은 인원수도 적은 청의 한인(漢人)에게 소작료를 내고 농사짓는 전호(佃戶)로 전락한 상태였으며, 심지어 마적에게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는 등 노예와 다름없는 학대를 당했다.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韓人)들도 중앙정부에 수차의 간도한인의 보호를 청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간도시찰사 이범윤도 정부에 수 십 번의 파병 요청을 했지만 정부 내의 각 부서의 권세다툼으로 인해 간도에 군병을 파병하지 않았다. 즉 간도의 사포대의 활동이 변계관리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내부대신, 경무대신, 원수부 장관 등의 알력으로 인해 간도파병을 결정하지 못했다. 당시 국익보다는 사익을 앞세운 관료들의 극도로 부패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범윤은 간도 한인으로부터 세금을 받아 사포대의 활동비용에 충당했으며, 모자산, 마안산, 두도구 등에 영소를 설치해 한인(韓人) 보호에 나셨다. 이후 양국의 주민과 군병과의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에 청의 이범윤에 대한 수차의 철퇴를 요구하자 결국 이범윤은 연해주로 이주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35년간의 항일투쟁시기에 해란강 일대가 항일전쟁의 중심지였다.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해란강의 상류지역에서 일어났다. 한인(韓人)의 항일열사 수가 무려 3300명이 넘었으며, 전체 간도 항일열사의 96.8%를 차지했다. 이 열사들 중에는 일제에 의해 살해된 수만 명의 한인(韓人)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우리는 도문(圖們)시 인민정부 청사에서 시장과 관련 인사들과 인사를 한 후 간단한 도문시 현황을 들었다. 도문(圖們)이라는 명칭은 두 차례의 감계회담인 을유년(1885년)과 정해년(1887년) 이후에 생긴 명칭이다. 을유년(1885년) 감계회담에서 청의 감계위원이 두만강을 도문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의 주장은 토문강과 두만강은 동일한 강이 아닌 전혀 다른 강이라고 주장한 반면 청은 토문강과 도문강(두만강)은 같은 강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양국 간의 명칭 논쟁이 새로운 ‘도문’이라는 명칭의 탄생을 가져왔다. 이후 청은 두만강을 도문강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1905년 청·일 간에 체결한 ‘간도협약’의 조약문에서 두만강을 ‘도문강’으로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청이 토문강과 두만강은 동일한 강의 증거를 중국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내세웠기에 ‘두만강’의 명칭보다 더 비슷한 ‘도문강’을 주로 사용했다.

두만강가의 도문시는 북한의 남양(南陽)시와 마주하고 있었다. 두만강의 선착장으로 도보로 걸었다. 가는 길가에는 북한에서 넘어온 꽃제비’들이 5~6명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을 피하는 눈치였다. 북한의 식량난이 점점 더 심각해지는 모양인 듯 했다. 북한은 이후 십년 동안 식량난으로 인해 수백 만 명이 기근으로 아사했다.

우리 일행은 두만강 철교와 우의교(友誼橋)에서 사진도 찍었다. 북중국경선은 강의 중심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철교도 반을 나누어 달리 색을 칠했다. 나는 강가로 내려가서 두만강 물을 두 손으로 움켜지고 만져보았다. 그리고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오르내리면서 김정구가 부른 슬픈 이별 가락인 ‘눈물 젖은 두만강’을 회상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1938년에 발표된 노래다. 이 노래 말에 나오는 ‘그리운 님’은 조국을 위해 북간도 용정촌으로 떠난 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항일투사를 상징한다. 이름 없이 사라진 항일투사들이 지킨 용정촌은 아직도 남의 땅이 돼 있으니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역사인 셈이다. 노래 가사에 있는 두만강의 물은 푸른 물빛이라 했지만 실제 물빛은 매우 탁한 회색이었다. 맞은 편 남양(南陽)시는 인적이 끊인 적막한 도시로 보이고 산 중턱에는 김일성에 대한 상투적인 저들의 구호가 두 군데 보인다.

도문시에서 연길로 돌아와 바로 연길시내의 시장과 상가를 방문했다. 건물 모습이나 시장 안은 우리의 시골도시 풍경과 비슷했다. 대부분 상점의 상호는 한글과 한자를 병행했다.

식품상가에는 동포 아주머니들이 장사를 많이 하고 있었으며, 전시된 의복류는 질이 많이 떨어진 옷들로 보였다. 연길 시내에서 만난 육순의 우리 동포 남자는 은퇴하고 연금으로 살아간다고 했다. 한글 일색인 시장거리를 거닐다보면 마치 먼 고향에 온 느낌이 든다. 백 년 전 이 연길시는 국자가(局子街)로 불렸으며, 용정에 비해 한족들이 대부분 거주했다.

북쪽의 지대가 높은 연길시의 중앙에 포이합통하가 흘려가다가 해란강을 만나 합수된다. 강북에 연변대학과 인민공원이 위치했고, 강남에 연길역이, 서쪽에는 연길공항이 위치했다. 내일은 제1회 조선학국제학술회의사 개최되는 연변대학을 방문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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