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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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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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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 국제외교안보팀 차장대우

   
 

미국은 물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미국이 이젠 없단 얘기다. 도발적 직설로 유명한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을 지난달 만나며 확신했다. 방한이 처음이라는 그에게 서울의 흥미로운 장면을 묻자 태극기집회를 꼽은 그가 되물었다. “그 집회에서 성조기는 왜 나와?” 한·미 동맹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한국을 위한 미국은 이제 없는데.” 덕수궁 대한문 앞 ‘한국인은 트럼프와 미국인을 사랑한다’ ‘한·미 동맹은 영원하다’는 플래카드가 무색했다.

요지는 이렇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며 돈과 시간을 팍팍 들인 것은 중동의 석유가 필요했기 때문인데, 이제 셰일가스로 에너지 자급의 꿈을 이뤘기에 판이 바뀌었다는 것. 세계의 1등 국가 자존심은 지키겠지만 미국은 세계 질서 유지에 관심이 없고, 한국은 이제 무소의 뿔처럼 혼자 살 길 찾아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항변해봤다. 최신 성능 페라리를 차고에만 넣어두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그는 “몰고 나가면 돈만 드는데, 과시만 하는 게 실속 차리는 것”이라 답했다. 사업가 기질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가 저물면 우리가 알던 미국이 돌아오지 않을까? 또 돌직구. “트럼프는 이제 신호탄일 뿐이야.”

물론 자이한의 개인적 의견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외교의 신고립주의 노선 추이를 보면 이제 시작이라는 게 미국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한국의 소위 진보, 일명 보수 세력 마음속에 굳어진 미국의 이미지에 작별을 고할 때가 됐단 얘기다. 대낮에 미국대사관저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이들 마음속 ‘악덕 미국’도, 피로서 한국을 언제까지나 지켜줄 ‘선한 미국’도 이제 없다. 미국은 진화했다. 이념 스펙트럼을 떠나 2019년 대한민국을 위한 진정한 실용외교가 뭔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버럭 외교’도,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유리알 외교’도 망국의 길이다. 당장 표 결집엔 반짝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몰라도. 당장 열흘 앞으로 닥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결정부터 현명함을 보여야 한다.

2015년 썼던 기획기사의 제목은 ‘외교는 재즈다…. 강·약 넘나드는 유연한 전략 펼칠 때’였다. 미국의 정통 외교관 리처드 홀브룩이 남긴 “하나의 테마를 다르게 변주하는 게 외교”라는 말에서 따왔다. 4년이 지났고, 정권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말이라 아프다. 뻣뻣하게 버티고 목소리만 큰 로큰롤 외교만 한다면, 19세기 구한말에서 우린 뭐가 더 나아졌을까. 우리가 알던 미국은 없다. 그걸 모르면 곧, 한국 외교도, 한국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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