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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독립운동가 아내의 일생, 의열단 김태규의 아내 박애신 이야기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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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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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원장, (사)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김태규, 3대째 교역자 배출한 기독교 집안 출신 / 한국의 요단강 세례 때 개종한 김이련의 손자

父 김병농 목사, 장로교 개척사의 중요한 인물 / 김태규․박애신, 결혼 앞두고 3.1운동 일어나

시아버지 이어 신랑 김태규 옥바라지까지 / 독립운동하는 남편 생각하며 모진 고생 참아

   
▲ 박애신 여사 가족사진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나던 그날 아침 서울의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출발한 안동행 첫차가 밤이 이슥해서야 압록강 철교를 건너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린 개성 남문교회 전도사 김지환(金智煥)이 주변을 살피며 역을 빠져 나와 안동현(安東縣) 3번통 2정목 3번지 집으로 김병농(金炳穠) 목사를 찾았다.

“의주 가셨습니다.”

김병농 목사는 3월 1일 의주 독립선언식에 독립을 위한 기도를 맡아 의주에 가고 없었다.

“이 문서를 상해의 현순 목사에게 우편으로 발송해 주게.”

그는 김병농 목사의 아들 김태규(金泰奎, 泰圭)에게 문서를 맡겼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인 3월 2일 밤 7시 의주 성내(城內) 칠현의 아동여관(亞東旅館)에서 김병농 목사를 만났다.

“장로교 함태영씨 심부름으로 독립에 관한 선언서 등 인쇄 문서를 아드님 태규군에게 맡겼습니다. 상해에 있는 현순(玄楯) 목사에게 우송해 주십시오, 파리 평화회의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 호 尤史) 박사에게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데 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한 여성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줄 이때에는 아무도 몰랐다.

박애신(朴愛信)은 그때 독립선언서 우송 책임을 맡았던 김병농 목사 아들 김태규와 3월 9일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19살의 신부는 의주의 독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으로 1900년 9월 9일 평북 의주군 의주읍 송산리 100번지에서 아버지 박삼득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신랑은 1889년 봄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 선교사가 압록강에서 33인에게 베푼 이른바 ‘한국의 요단강 세례’ 때 개종한 김이련(金利鍊)의 손자(金澤根의 아들)로 3대째 교역자를 배출한 기독교 집안 출신이며,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는 전주, 대구, 의주와 만주 등지의 초기 장로교 개척사에 중요한 인물이었다.

신랑 김태규는 박애신이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만났던 ‘교회 오빠’로, 김병농 목사가 전주, 대구 등지에서 한국인으로서 첫 담임목사를 하며 교회를 개척했을 때 아버지 임지 따라 학교를 옮겨 다니느라 만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의주에 돌아오자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둘은 1918년 가을 양가 부모의 허락을 얻었고, 이제 신의주에 신혼집도 마련하는 등 가슴 부푼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박애신 여사의 남편 의열단 김태규의 서대문 감옥 수감 사진(감시대상 인물카드)

3월 1일의 의주 서부교회를 중심으로 8백여명의 독립만세 시위에 이어 이튿날 다시 1200명이 모여 더 큰 시위가 일어났다. 헌병대가 주도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검거는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3월 4일에는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김지환이 검문이 심한 신의주를 피해 백마역에서 서울(경성)행 기차를 타려다 체포되었다. 김병농 목사도 붙잡혀 3월 6일 서울의 경무총감부에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런 와중에 3월 9일 결혼식을 치렀다. 독립선언서의 국외 유출을 막고자 김태규를 찾아 형사대가 들이닥쳤다. 김태규는 급히 몸을 숨겼다. 신혼의 달콤한 꿈은 산산이 깨어지고, 걱정과 가슴 졸이는 긴장이 무겁게 집안을 눌렀다.

박애신은 큰며느리로서 시아버지 옥바라지를 해야 했다. 서울에 출가한 큰시누이가 있었다. 박애신은 신랑의 누나인 큰 시누이 김신삼 집에 머물며 서대문 감옥 미결감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 옥바라지를 했다.

새신부가 예심과 복심을 거치며 김병농 목사의 1년 형 옥바라지를 하는 동안, 잠적한 새신랑 김태규는 임시정부의 국내 연락기관인 안동교통국 요원이 되어 안동과 국내 각지를 다니며 임무를 수행했다. 1920년 3.1운동 발발 1주년을 앞두고 김태규는 대대적인 만세운동 준비와 경상북도 교통국 설치를 위해 대구에 갔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소식에 어린 아내 박애신은 다시 간이 덜컥 떨어졌다.

1920년 5월 중순 김태규의 1년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의 미결수 감방에서 기결수 감방으로 옮기던 날, 5월 27일의 석방 날을 열흘 남짓 앞둔 아버지 김병농 목사를 감옥 안에서 만나게 되었다. 박애신에게는 시아버지 옥바라지 1년 세월이 끝나려할 시점에 다시 남편 옥바라지 1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편을 감옥 면회실에서나마 만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사식과 솜옷을 들이는 등 정성을 다했다.

이윽고 1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하는 날이 왔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기쁜 적이 없었어요.”

박애신은 남편과 같이 신의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맛보게 된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길 기도했다.

의주로 돌아온 김태규는 한동안 건강을 회복하며 기독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했다. 몸이 회복되자 옥중에서 거듭거듭 해 왔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독립운동의 길에 다시 나서는 것이었다. 동지들과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아내는 남편을 어쩌면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남편이 떠났다. 집안일은 오롯이 아내 몫이 되었다. “총 맞아 죽고, 얼어 죽으며, 굶어서 죽는다.”는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생각하며 자신의 고생을 사치로 여겼다. 그럼에도 남편에 대한 그리움, 스며드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1923년 1월의 서울. 열흘 동안 김상옥 의사 사건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나갔다. 3월에 의열단의 제2차 폭탄반입사건이 일어나 김시현(金始顯)과 황옥(黃鈺) 경부 등 가담자 18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관련자 전원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적과 같이 탈출한 의열단원 한 사람이 있었다. 김태규였다. 서울의 누나 김신삼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우리 집에 숨어 있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가족들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방바닥의 멍석으로 김태규를 둘둘 말아서 한쪽에 밀쳐 두었다.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던 경찰이 멍석을 힐끗 보고는 나가버렸다.”

여러 날이 지난 후 동아일보는 1923년 4월 26일자 상해 발 기사에서 “폭탄 관계자 김태규 광동에”라 보도함으로써 그의 탈출을 세상에 알렸다.

집 주변에는 항상 감시의 눈초리와 미행의 그림자가 맴돌았다.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걱정하며 이제나 저제나 소식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남편이 인편으로 전갈을 보내왔다.

“모월 모일에 어느 역을 지나가게 되었소. 아이를 낳았다는데 얼굴을 보고 싶으니 기차역에 나와 주면 좋겠소.”

약속된 날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하며 기다렸다가 젖먹이를 안고 역으로 나갔다. 열차가 지나가고도 한참이나 하염없이 서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다시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박애신은 그 젖먹이를 아비 없는 자식이라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훌륭하게 키워냈다.

해방이 되고 6.25전쟁이 일어났다. 박애신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아들 김동수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두 모자는 남한 호적을 취득하기 위해 1960년 취적 신고하게 되었다. 연해주로 가다가 피격되어 사망하였다는 소문만 들릴 뿐 생사를 모르는 남편 김태규. 기차역에서 차창 상봉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끊어진 세월이 30여년이었다. 아들 김동수는 어머니 박애신의 기억 속에 마지막 장면이었던 1922년과 독립운동의 상징인 3월 1일로 부친의 사망신고를 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장남 출생일도 3월 1일로 하여 아버지 김태규의 독립운동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 박애신 여사

손자 김명곤 씨의 기억 속 박애신 할머니는 쪽진 머리, 주름진 창백한 얼굴, 잔잔한 미소 그리고 특이한 것은 언제나 옷을 입은 채로 주무셨다. “어릴 땐 아무 생각 없었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당신의 주변엔 늘 감당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스스로 대비해야 했기에 자연히 몸에 배인 습관일 것이다.”고 말한다.

모진 세월, 끝 모를 불안함이 심장병이 되었다. 손자의 기억 속에 할머니는 “부산에서 살 때는 부산대학병원에서, 서울로 와서는 성모병원 등에서 입․퇴원을 반복하였고, 가족들은 미역국을 싸들고 병원 면회 가는 것이 일상처럼 여겨졌던 적도 많았다. 신혼 초기부터 잡혀가고 수색당하고 쫓기며 살아왔고 해방 이후에는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그리워하며 애태우다 얻은 마음의 병이 몸까지 고장나게 한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손주들이 잘못하거나 떼를 쓸 때 버릇을 가르치려고 며느리가 매를 들면 ‘나의 귀한 손주를 때리다니 너도 맞아라’ 하시며 등을 한 대 치셨다.”고 손자는 회고했다. 그런 박애신 할머니가 어느 날 며느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날 제 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죽으려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아이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였다.”

늘 하늘의 평안을 간구하는 찬송을 부르며 위안으로 삼다가 1969년 5월 5일 외롭고도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19살 나이로 시집오자마자 남편을 자유와 독립의 제단에 바친 한 여인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가 거저 얻은 것이 아님을 기억한다. 우리는 빚진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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