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법관신분으로 행형제도 시찰차 미국을 방문했던 프랑스의 정치가·역사학자 토크빌(A.C.H. Clérel de Tocqueville)은 1년 동안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미국 민주주의의 실상을 살펴보고 나서 저술한 ‘아메리카의 민주주의’에서 “문명세계에서 미국만큼 철학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밖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나라는 없다”라고 단언했었지만 그게 바로 미국인들의 철학이라는 것을 토크빌은 몰랐던 것 같다.

꿩 잡는 게 매, 유용한 것은 모두 진리, 미국인들은 관념이나 사상보다는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 이른 바 ‘프라그마티즘(pragmatism)’이다. ‘pragmatism’의 뿌리는 ‘행위’ ‘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pragma’, 인간 생활에서의 유용성을 떠난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쓸모의 철학’은 유럽에서 발생했지만 그걸 꽃 피운 건 미국인들이었다.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미시간대학을 거쳐 시카고대학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했었던 존 듀이(John Dewey)를 빼놓으면 프라그마티즘은 팥소(앙꼬) 없는 찐빵으로 전락해버린다.

듀이는 좋게 말하면 청출어람(靑出於藍), 나쁘게 말하면 태어나서 어미를 물어 죽이고 어미의 속살을 파먹고 자라는 살모사 같은 철학자였다. 관념적 진리를 추구하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헤겔 연구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관념보다는 실용을 중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헤겔을 짓밟은 셈이 되고 말았다.

듀이의 학문적 태도 자체가 프라그마티즘의 본보기(?)였다고 하겠다. 또 듀이가 시카고 대학을 프라그마티즘의 산실로 삼을 수 있었던 것도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우연은 아니었다. 1882년에 설립된 시카고 대학은 기존의 관념적 전통에 사로잡혀 있던 다른 대학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라도 자유로운 사고로 실용을 추구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밖에 없었고 거기서 듀이는 미국 교육계의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시카고 실험학교’를 설립하여 자신의 철학과 교육관을 구체화하는 한편 미국 프라그마티즘의 원전으로 불리는 네 개의 주요한 저작을 발표할 수 있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실용을 중시하는 ‘시카고’ 냄새를 짙게 풍긴다. 태어난 곳은 하와이였지만 시카고에서 사회의 첫발을 내딛으면서 정치철학을 키웠고, 부인 미셸 또한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며, 당파와 사상과 인종을 초월하여 적임자들만 골라 조각했는가 하면 작금의 경제 위기와 관련해서도 ‘시카고 학파’에게서 자문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에 속한다.

오바마가 틈날 때마다 미국의 체면 염치 불구하고 자동차 산업이나 교육 등과 관련 한국 칭찬을 하는 데 대해 실용보다는 혈연·지연 따위를 중시하는 한국인들은 “유진 강 등 한인 2세 보좌진들 영향이 크지 않겠느냐?”고 우쭐해하지만 오바마가 “쓸모 있으면 적이라도 데려다 쓴다”는 실용주의자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어제 캐슬린 시벨리우스 미국 보건부 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의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을 만나자마자 “한국이 전 국민 보험을 제공한다는데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보건의료개혁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계속적인 정보 및 경험 교환을 기대한다”고 한국의 도움을 요청하고 나선 데 대해서도 한국의 주요언론들은 “미국이 한국 배우기에 나섰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4천6백만이나 되는 무보험 국민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두 팔 걷어붙이는 오바마 행정부의 겸손한 실용주의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국민을 위해서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납작 엎드린다?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버리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미국의 종속국이나 다름없는 한국에게서도 배운다? 참으로 무섭고도 존경스런 실용주의 정치의 샘플을 보는 듯하다.

실용주의적 가치를 내걸고 당선됐지만 취임 이후 정권의 권위와 체면 세우기에 급급하면서 지연·학연에 묶여 부자나 기업 등 소수를 위한 물질주의적 가치만을 추구해온 이명박 정부가 보고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출처 : 미주세계일보 코리아타운 / 채수경 주필 / 09.07.16)